가리베가스에서 재중동포의 상징적 공간으로

  내가 변화한 가리봉동의 풍경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가리베가스>(이선민 감독, 2005)라는 독립영화를 통해서였다. 가리봉동의 단칸방에 살던 한국인여성노동자가 공장의 이전을 따라 이사하는 과정을 짤막하게 담아낸 이 영화는 그녀가 머물렀던 장소로서의 가리봉동 일대를 담백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주인공이 머물렀던 ‘쪽방’은 60년대부터 80년대 후반 무렵까지 산업근대화프로젝트의 핵심역할을 수행했던 한국수출산업단지가 가리봉동에 남긴 흔적이다. 대규모로 설립된 공장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가까운 가리봉동 일대에 집단거주하면서, 가리봉동에는 겨우 몸 하나 누일만한 크기의 쪽방이 가득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바쁘게 짐을 부리고 추억을 쓸어내리던 주인공이 남기고 떠난 쪽방에는 동남아시아 남성이주노동자들이 찾아든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방을 찾았던 것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한국에 온 재중동포(1)들이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정치·경제적 이유로 중국의 동베이싼성(東北三省)중국의 최동북쪽에 위치한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롱쟝성(黑龍江省)을 통틀어 일컫는 말으로 이주하였던 재중동포들은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한국에 역이주(return-migration)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고도로 발달한 경제체제가 배태한 저임금 서비스업과 한국인의 멸시, 그리고 차별뿐이었다. 고단한 노동에 지치고 각박한 서울생활에 지친 재중동포들은 교통이 편리하고 방값이 싸며 단기 임대가 가능한 가리봉동에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재중동포들이 머물게 되면서 가리봉동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노동자들이 떠난 후에도 지역을 버리지 않았던 한국인 상인들은 재중동포들이 찾는 중국 물건을 구해다 팔기 시작했다. 결혼 이주 여성이나 한국에서의 노동으로 자본을 모은 재중동포들은 그들이 그리워하는 고향 동북 삼성의 음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중국 관련 상점들은 가리봉동 시장 일대의 거리를 중국 간체자(簡體字)(2) 간판으로 가득 찬 풍광으로 바꾸었다. 이제 가리봉동은 ‘제2의 고향’이라 불릴 만큼 재중동포들에게는 상징적인 곳이 되었다. 재중동포들이 서울 전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실제로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이들의 수는 예전 같지 않지만, 중국 관련 상점의 밀집과 그로 인해 문화소비가 가능한 가리봉동 일대는 재중동포들의 경제·문화적 중심지로 여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재중동포의 이산 문화와 장소 만들기(place-making)

  콩(Kong)은 베이징에 거주하는 싱가폴인에 대한 연구에서 이주자들이 새로운 맥락(새로 이주한 국가)에서 고국의 문화를 되살리려고 하는 행동들을 향수적 환영(nostalgic illusion)(3)이라고 칭한다. 이는 과거를 불러일으켜 다시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개인·집단적 차원의 구술적 상상과 고향을 실연(enactment)하는 행위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이 때 주의해야할 것은 고향은 언제나 국민국가의 영토적 정의를 동반한 물리적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향은 구체적인 실천과 일상, 사회적 관계들, 감정적 연결이나 상징적 개념, 혹은 향수적인 과거나 유토피아적인 미래일 수 있다.(4)이러한 논의는 가리봉동을 재중동포의 ‘제2의 고향’으로 만드는 장소 만들기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가리봉동이 재중동포들에게 ‘제2의 고향’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도 음식이라는 매개가 큰 역할을 하였다. 가리봉동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외부인에게는 모두 중국이라는 기호 아래 단일하게 인식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여러 민족과 문화의 음식이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이 재중동포의 고향이라는 기호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재중동포가 음식을 통해 가리봉동을 ‘제2의 고향’으로 느끼는 이유는 고향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상상하는 ‘국가적 영토’를 음식이 상징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주자로서 언제나 이산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재중동포들에게 고향은 이들이 동베이싼성이라는 공간 안에서 행위했던 일상의 실천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재중동포들은 집에서 반찬으로 해먹던 처우또우푸(臭豆腐)두부를 삭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중국요리, 건두부말린 두부 부침과 같은 조선식 식사와, 그 기원은 본래 평양이나 함흥이지만 조선에서 이주한 재중동포 1세대에 의해 변형된 연변냉면, 그리고  간단한 요깃거리 혹은 술안주로 중국 전역에 퍼지면서 재중동포들도 즐겨 먹게 된 중국 신장 위구르족의 양로우촨(羊肉串儿)양고기꼬치와 주로 특별한 날 선택했던 궈바로우(鍋巴肉)북경식 탕수육나 훠궈(火鍋)중국식 샤브샤브와 같은 중국 한족의 요리를 먹으면서 마치 고향에 온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동베이싼셩이라는 공간이 역설적으로 이미 지역적 경계의 의미를 삭제하고 여러 지역의 문화를 혼종적으로 담지한 공간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재중동포의, 그리고 이주자·이산민의 문화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국민국가의 영토적 이데올로기에 갇힌 것이 아니다. 재중동포의 이러한 문화적 혼종성은 다시 중국의 동베이싼셩과 한국의 가리봉동이라는 물리적 영토에 재기입되며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로써 국민국가의 영토는 자신을 한계지우는 물리적 경계를 넘나들며 사유된다. 더 이상 지역과 주체의 정체성은 물리적 영토의 틀 안에서 상상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주자들의 이동과 그들의 이산 문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자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주와 공간, 그리고 가리봉동

이제까지 이주자들의 공간은 분리주의로 인한 인종적 게토(ghetto)이주자들의 집단거주지역의 이미지를 버리지 못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서울의 곳곳에 등장하고 있는 이산 동네에는 계급과 민족이라는 좌표에 위치 지워 소비하려는 욕망들이 하나 둘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주자들의 공간은 복잡한 문화적 각축과 협상, 그리고 문화적 혼종의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며, 이는 더 이상 지역이라는 것을 물리적 영토의 경계에 의한 정의로 상상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재중동포들의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가리봉동은 이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