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니 훼(Hue)베트남 중부에 있는 도시가 불쑥 생각난다. 고도(古都) 훼를 찾은 것은 작년 7월 초, 세장(細長)한 베트남의 잘숙한 허리에 위치한 훼가 남쪽의 호찌민시(구 사이공)보다 더 덥다는 소문에 더위에 약한 나는 약간 겁먹은 채 호찌민시 떤선녓공항을 이륙했다. 그런데 기우였다. 훼공항에서 시내의 숙소, 호텔 사이공 모린(Hotel Saigon Morin)에 이르는 길 연변의 아담한 주택들과 불빛 속에 도란거리는 주민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음날 아침 눈뜨자 안겨오는 흐엉장(香江)의 치런한 흐름이며 오묘한 주홍빛으로 남국의 거리를 예쁘게 수놓은 화훵(花鳳)붉은 꽃을 일컫는 말에 홀리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씨끌로베트남식 인력거를 타고 황궁(皇宮)으로 향할 때 우리를 감싸는 바람의 시원함에 피부의 숨구멍들이 일제히 열리는 것을 감촉하면서, 훼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가만히 되뇌었다.

  나는 작년 2월 초, 인하대 BK(Brain Korea)사업단 단장 자격으로 베트남을 처음 방문했다. 우리 동아시아한국학 사업단은 민족주의에 갇힌 한국학을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쇄신하기 위한 토론의 장소로 호찌민시를 선택했다. 베트남과 한국, 중국, 일본, 몽골, 호주의 한국학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은 회의도 소중했지만, 나는 베트남을 직접 경험하는 흥취에 내내 겨웠던 터다. 5개월 뒤 나는 서남(瑞南)포럼 운영위원장으로서 베트남을 다시 찾았다. 동아시아연대를 모색해 온 서남포럼은 그 동안의 동북아 탐사를 바탕으로 동남아를 주목하면서 ‘동남아와 동북아의 대화’라는 이름의 호찌민시 워크숍을 기획했으니, 그 덕분에 우리 일행은 훼를 방문하는 행운까지 누렸던 것이다. 

  다리를 건너 씨끌로가 멈춰 선 곳에서 바라보니 황궁의 당당한 문이 눈에 든다. 이름하여 응오몬(午門), 베이징(北京) 즈진청(紫禁城)의 문 이름과 같다. 웅장한 문을 통과하여 황궁의 화려한 전각들과 섬세한 조각을 베푼 구정(九鼎)을 둘러보며 오늘의 베트남 판도를 완성한 응우웬조(阮朝, 1802~1945)가 일본처럼 황제국을 자임했던 사정을 실감한 것이다. 아다시피 동북아적인 북부와 동남아적인 남부로 분절된 베트남을 최초로 통일한 것이 응우웬조다. 그런데 이 지난한 통일사업에 서양의 그림자가 얼비친다. 응오몬 앞의 깃발탑과 대포들은 서양기술이 이미 채택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과연 일찍이 동남아에 도착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베트남 통일운동에 일정한 자극을 행사했던 것이다. 무기를 비롯한 기술만이 아니라 서양의 충격이 네이션의 탄생을 촉진했다는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발걸음은 드디어 커다란 폐허에 도착했다. 이른바 구정(舊正)공세(1)로 파괴된 자금성황실의 생활공간으로 설립된 베트남 황궁 내성의 이름의 유지(遺址)가 이곳이라는 우리의 안내자 최병욱교수의 설명에 일행은 숙연했다. 북베트남군의 대규모 공격은 단기적으로는 엄청난 손실 속에 저지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패배를 준비한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거니와, 그 와중에 베트남 통일의 상징, 황궁이 심각하게 파괴된 것은 예리한 반어가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 복원공사가 진행되는 ‘황성(荒城)옛터’를 바라보면서 전쟁이라는 악을 새삼 되새긴다.

  구정공세로 자금성이 파괴된 1968년 나는 대학 신입생이었다. 이 엄청난 전쟁에 대해 거의 문맹상태였던 것을 상기하면 지금도 부끄럼을 감출 수 없다. 아마도 후일 「아시아의 연대:『월남망국사』소고」(1983)와 「한국소설에 나타난 베트남전쟁」(1989) 등을 초(草)하여 베트남에 대한 사모를 기록한 것은 그 작은 보상(報償)일지도 모른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과 한국의 관계를 왜곡한 전형적인 것이지만, 그 굴절이 역으로 베트남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베트남전쟁은 한국지식인사회를 동아시아로 인도한 스승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특히 빤 보이 쩌우(潘佩珠, 1867~1940)를 발견한 것은 나의 공부길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조선이 일제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한 때 당대의 애국계몽운동에 침통한 영감을 제공한 『월남망국사』는 기념비적이다. 요코하마에서 이루어진, 중국 망명객 량 치차오(梁啓超, 1873~1929)와 월남 망명객 소남자(巢南子)의 대화를 기록한 이 책은 1906년에 처음 번역된 이후 일본통감부에 의해 1908년 금서로 묶이기까지 판을 거듭했는데, 프랑스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애국자들의 투쟁의 전말을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로 보고한 대목이 백미다. 소남자가 누구일까? 나는 후배 백영서의 도움으로 일본쪽 자료를 섭렵, 드디어 소남자가 베트남 민족운동의 아버지 빤 보이 쩌우(1867~1940)임을 확정하였다. 쩌우를 계승하여 베트남혁명을 완성한 호 찌 민(胡志明: 1890~1976)주석이 아버지의 소개로 쩌우와 만났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동향(同鄕)의 두 애국자가 모두 훼에서 활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훼 방문의 의미는 내게 각별한 것이었다. 소남자가 쩌우임을 발견한 기쁨에 ‘아시아의 연대’라는 제목을 붙인 그때의 감회가 이 도시에서 운명한 빤 보이 쩌우를 가만히 추모하는 행선(行禪) 속에 다시금 생생해진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며 훼의 상징, 멋진 칠층탑이 모셔진 티엔 무사(靈姥寺)를 구경하고 응우웬조의 2대 황제 민망제(明命帝: 재위 1820~40)의 능을 찾았다. 안팎의 도전을 극복하고 유교를 축으로 나라의 통일을 한층 견고히 구축한 영명한 군주답게 그의 능은 웅장하고도 화려했다. 특히 능침 앞의 다리는 섬세한 조각을 베푼 세련된 배치가 수련(垂蓮) 뜬 해자(垓字)와 어울려 베트남문화의 정화(精華)로 손색이 없다. 아쉬운 훼 방문을 마감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최병욱교수는 ‘호아저씨’(호 찌 민의 애칭)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키워낸 구옥혹(國學)을 보여줬다. 중등학교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건물이 아름다웠다. 저녁 비행기로 훼 공항을 이륙하면서 훼야말로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숨은 축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화력의 종요로움을 새삼 새긴다. 베트남정부가 훼의 재건에 힘을 쏟는 이유를 이제야 알 듯하다. 무력통일이 초래할 수 있는 어떤 후유증을 치유하는 데 남북베트남을 잇는 황금의 문화고리 훼는 베트남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훼가 부활하는 날, 동남아와 동북아를 매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집합적 대두를 견인할 베트남의 역사적 역할도 한층 드높아질 것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