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국사(一國史)를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당위적 언명의 지리한 반복은 선언의 신선함마저 부식시킨다. 이제는 구체적인 지적 성과물로 점증하는 회의적 시선을 감당해야 할 때이다. 해체와 탈구축의 도전적 문제제기가 담론 비판에 안주하면서, 역사 허무주의의 폐허로 귀착되곤 했기 때문이다.
마침 동아시아전쟁사연구회의 발족이 반갑다. 아(我)와 비아(非我)가 다투는 전쟁이야말로 국가 중심의 역사서술이 경합하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끝에는 ‘역사전쟁’이라는 후반전이 시작된다. 임진왜란 또한 한국에서는 항쟁사로, 일본에서는 대륙 침략의 선구적 업적으로, 중국에서는 일본을 패퇴시킨 대국사의 일환으로 그려져 왔다. 과연 이 치열한 언술의 전장에서 탈중심적 역사서술이라는 새로운 진지를 구축해 낼 수 있을까. 기존의 연구에 대한 필자들의 선전포고에 우선 아낌없는 박수부터 보낸다.  

  논개, 이순신, 히데요시 등 임진왜란의 아이콘이라고 할 만한 인물들의 역사적 기억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은 흥미롭다. 하지만 딱히 참신하지는 않았는데, ‘기억의 정치성’에 대한 연구가 적잖이 축적되어 있기에 충분히 예측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후 형성된 기억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임진왜란을 역사화하는 작업의 전제는 될지언정, 그 자체는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전체 분량의 3/4를 전쟁의 기억에 대한 내용으로 채운 것은 아쉽다는 말이다. 이 책 역시 기억의 정치학을 폭로하고 해체하는 데 그쳐 담론 분석에 머물고 만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즉 국제적 전쟁이라는 관점으로 임진왜란을 동아시아의 맥락 속에 재구축하는 성과는 미흡해 보인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전쟁사에 준하는 글은 책의 후반부에 있다. 특히 조선-명-일본의 삼각 구도에서는 포착되지 않던 사각에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를 꿈꾸던 누르하치(Nurhachi, 1559~1626)중국 청나라 창건자에 주목한 연구는 이 책의 백미이다. 16세기 말의 중화체제에 도전하려는 이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와 누르하치를 마주세우면서, 일거에 임진왜란 전후의 동아시아에 대한 시각을 확충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을 대신한 ‘동아시아삼국전쟁’이라는 용어가 과연 적절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명, 조선, 일본만이 아니라 북방의 누르하치와 남방의 류우큐우(琉球), 동남아도 이 전쟁에 개입했던 역사적 사실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구의 영향까지 고려한다면, ‘삼국’이라는 그릇은 전쟁의 규모와 역사적 의의를 담아내기에는 협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제1차 동아시아전쟁’이라는 발상은 어떠할까.

  ‘제1차’라는 명칭을 제안한 것은 필자들이 이 전쟁과 300년 후의 전쟁을 관련시켜 이해하는 방식을 목적론이라며, ‘반역사적 태도’로 단죄하는 것에 쉬이 동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선 목적론과 전조는 다름을 지적하고 싶다. 왜란이라는 명칭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이 전쟁을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화의 전조로 치부하는 것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동아시아 근현대사와 관련시켜 파악하지 않겠다는 발상은 또 다른 목적론이며, 이것이야말로 ‘비역사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동아시아삼국전쟁은 여러 점에서 동아시아의 근대를 선취하고 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기세가 반도와 대륙으로 뻗어간 데에는 서양으로부터의 무력과 문명의 도입이 있었다. 반도를 향하는 뱃머리에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조총을 든 군인과 함께 ‘예수’와 ‘야수’의 경계에 있던 ‘야소회’ 선교사도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은광개발 열기와 대외무역 확산 요구는 유럽-아메리카-아시아를 잇는 은(銀)무역 네트워크에 동아시아가 편입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확산되는 세계체제와 동아시아의 중화체제가 상호 침투하고 교착하며 충돌을 빚어낸 첫번째 국제전이라는 점에서 제1차 동아시아전쟁은 근대 동아시아 질서의 전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 은경제망의 최종적 도착지가 명이었다는 사실과, 세계지도와 천주교, 기하학을 전수해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명을 방문한 것이 전쟁 발발 몇 해 전(1582)임을 상기한다면, 이 전쟁이 단순히 동아시아 내부의 문제가 아님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1592)의 꼭 100년 전에 신대륙의 발견(1492)이 있었듯이, 대서양과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으로 밀려온 대항해 시대의 파고가 동해와 황해로 흘러들어 파문을 일으킨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 동아시아삼국전쟁인 것이다. 이 전쟁으로 명이 쇠퇴하고 청조가 들어섰다는 점은 세계체제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중심부의 교체를 통해 중화체제가 유지될 만한 내구력이 있었다는 반증이다.

  또 하나, 일국사의 관점을 탈피하겠다는 지향과 한반도의 현장성에 밀착된 연구는 별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임진왜란에 이어진 병자호란(1636)은 일본의 도전이 실패로 끝난 후 중화체제의 패권을 다투고 명과 청이 조선을 압박하여 실력을 겨룬 사건이다. 즉 임진왜란도, 명청교체도, 그리고 훗날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은 동아시아의 모순이 한반도에 응축되어 왔음을 증언해 준다. 이는 탈국가, 탈민족의 수사학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정학적 숙명인 것이다. 하여 필요한 것은 관념적 선언이나 구호가 아니라 한반도의 숙명을 감당해 나가는 ‘장소의 혼’이 깃든 연구가 아닐까. 이곳에 응축되어 있는 세계사적 모순을 풀어나가는 과업에 매진한다는 발상과 태도야말로 동아시아전쟁사연구회의 성과가 한층 풍요로워지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