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범 라우티(Beom Rauti)의 동화 『돌 깨는 아이들』의 책장을 넘기는데, 전북 장수라는 곳의 풍경이 눈앞에 겹쳐졌다. 그곳은 선친의 고향으로, 어렸을 적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매년 한 두 번은 들렀던 곳이다. 그런데 『돌 깨는 아이들』과 장수라는 곳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장수에는 질 좋은 돌이 많이 난다. 때문에 지금도 장수 돌솥과 돌침대의 명성이 자자하다. 서울에서 뿌리박고 사는 일가 어른들이 누군가에게 고향 얘기를 할 때면 꼭 고향의 돌솥을 자랑할 정도니.

  초등학생 시절 추석이었던가. 나는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벽밥을 지어 먹은 후 요기라곤 전혀 못한 채 인천에서부터 버스를 너댓 번 갈아타서 열 시간 가까이 힘들게 내려온 터라 뱃가죽이 달라붙도록 배가 고팠지만, 발이라도 달린 장승처럼 묵묵히 앞장서는 아버지를 행여나 놓칠세라 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아버지를 쫓았다. 황혼이 내릴 무렵 채석장 몇 군데를 지나치게 됐다. 그 때 나는 『돌 깨는 아이들』의 주인공 찬떼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쇠망치와 정을 들고 돌을 깨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삼십여 년 전 일인데도 소년의 새카맣던 얼굴이 방금 인화해 놓은 사진을 보듯 떠오르며, 소년의 둔탁한 망치질 소리 또한 귓전에 울려든다.

  네팔이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과 우뚝 솟은 고봉들이 병풍을 치고 있는 그저 평화로운 나라인줄로만 알았지, 10년이 넘게 내전이 일어나 수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는 『돌 깨는 아이들』에서 처음 접하는 소리였다. 더군다나 네팔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민간인을 셀 수도 없이 죽이고 아이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는 것도, 가난에 찌든 아이들이 고되고 위험한 노동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쓴 범 라우티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네팔의 만년설에 눈이 멀어 그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비참한 삶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돌 깨는 아이들』의 주인공 찬떼와 순떨이 남매가 정부군의 첩자 노릇을 하게 되고, 반군에게 붙들려서는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내몰려 불구가 되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나는 인생의 비극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비극적인 동화는 짧으나마 인류의 고통에 대해 이처럼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것이 나 혼자뿐일까라는 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50여 년 전 우리도 전쟁 때문에 부모와 헤어지고 원치 않는 전쟁터로 내몰리고 서로 죽이고 고문하고 고아가 되는 동병상련의 비극을 겪었던 것을 폐품창고와도 같은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평화와 인권,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병상 위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언어들을 돌이 섞인 밥을 씹듯 조심스레 우물거릴 수 있었다.

  이 책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주인공들이 전쟁에 휘말리고, 부모를 잃고, 불구가 되는 극적인 이야기에는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평화의 소중함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범 라우티도 “네팔의 어린이 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자의 그런 소박한 바람이 우리나라에서 실현될지는 회의적이다. 우리 사회는 타국의 인권, 이방인의 삶에 눈을 돌릴 만큼 자비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력을 가진 부국임에도 불구하고, 네팔의 어린이들처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고되고 위험한 노동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어찌됐든 나는 네팔 출신의 이주노동자이자 동화작가인 범 라우티에게 정신적인 빚을 크게 졌다. 그의 동화는 삼십 여 년이라는 기억 저편에 망각하고 있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돌 깨는 아이’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