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이 화염 속에 사라지던 2월 11일을 제2의 국치일(國恥日)이라고 하던 사람이 있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자괴 그리고 허탈이 뒤범벅된 형언할 수 없이 참담한 심사를 내뱉은 말이지만, 그날은 그리고 그 얼마 뒤까지는 그 말이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우리 국민은 국보 하나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없는 국민’이라는 극언을 퍼붓기도 했다. 마음은 쓰라려도 이 또한 수긍이 갔다. 거기에 스스로 가혹한 매질로 자신을 무참히 탄핵하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역시 며칠은 그랬다.
축대만 겨우 남은 숭례문의 형해는 재빨리 포장에 가려졌고, 우리는 언제 그랬냐 싶게 저마다 일상으로 돌아갔다. 일전, 도하(都下) 신문들 지면에는 상고(喪故) 숭례문이 어느덧 사십구일재(四十九日齋)를 맞는다는 짧은 토픽류 기사들이 실렸다. 화면에는 목탁을 두드리는 승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무심했다. 설 연휴 끝자락, 그 며칠 동안 온통 끓어넘치던 국치의 감정도, 혹독한 자기 편달(鞭撻)도, 반성의 통념(痛念)도 간 데 없다. 때가 되면 어련히 다시 복원이 될까 하는 정도로 그렇게 무심해져 버렸다. 늙은 방화범이 뻔뻔하게 ‘다시 복원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 그 말처럼.

하지만 불을 내는 것도, 그것을 쉽게 잊는 것도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어딘가에 실려 있던 이런 꼬집음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잊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 잊지 않으면 안 되는 속사정이라도 있는 듯 단 며칠이면 세상없는 일도 이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사람들.
망각은 ‘잘 모르고 관심 없는 데서’ 생길 것이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을 예로 든다면 그 의미와 상징이 무엇이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신, 문화가치는 얼마나 크고, 또 그것이 누가 향유할 자산이며, 누가 물려받을 유산인가 하는 등에 대해 우리는 철저히 무지했다. 그러니까 결국 범인도 우리도 모두 숭례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뒤늦게 안 것이 있다면 ‘이제 사라졌으니까 복원하면 된다’는 사실뿐. 늙은 범인은 자신이 입었다는 손해(토지 문제)를 보상받기 위해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그의 무지는 국보 1호를 불태우고 복원하는 일을 고작 낡은 옛 집을 부수고 재건축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이런 무지가 인천에서는 1968년 4월 26일, ‘오래당집’이라고 불리던 붉은 벽돌 돔(dome) 주택 오례당을 불태웠다. 현존한다면 근대 서양식 건축물로 지방문화재가 되고도 남았을 이 건물은 개항과 더불어 인천에 들어온 외국인 중 한 명인 중국인 우 리탕(吳禮堂)이 1900년대 초기에 지은 대저택이었다.

의젓이 둥근 돔을 지닌 인천 유일의 붉은 벽돌 저택이다. 높은 축대 위에 앞이 툭 터진 항구를 껴안고 좌정한 품이 만근(萬斤)의 안정감을 던져 준다. 쓸모 있고 재치 있게 마련된 베란다가 정답고, 바다를 향해서 널찍널찍하게 뚫린 유리창이 몹시 시원스럽다.1

새까만 오석(烏石)을 다듬은 슬레이트 지붕과 대추색으로 빛나던 빨간 벽돌로 예쁘게 쌓아 올린 외벽 그리고 티크 나무로 짜진 유리창이 우아하게 설계된 2층 건물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바라보면 바로 언덕 위에 솟아 있는 존스턴 별장과 나란히 아름다운 랜드마크를 이루고 있었다.2

『개항과 양관 역정』을 쓴 고 최성연(崔聖淵) 선생의 묘사나 『인천 한 세기』의 저자 고 신태범(?兌範) 박사의 기술처럼 오례당은 인천의 아주 아름다운 명물이었다. 이런 건물을 특수 기관이 아무렇게나 사용하다가 일순에 실화로 소실해 버린 것이다.3 건축물의 의미도 가치도 모른 채.
이튿날, 불길은 보지 못했으나 잘 쌓은 돌 축대 위에 형해만 남은 오례당을 볼 수 있었다. 외국 성관(城館)을 보는 듯 이국정취를 자아내던 오례당은 그렇게 덧없이 사라졌다. 물론 외국인이 살던 주택 한 채를 언감(焉敢)히 숭례문에 비하랴만 밤새 불길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는 국보 1호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문득 그때 오례당이 떠올랐다.
우리는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국보가, 문화재가 지니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교육받은 바가 있었던가. 경제, 산업, 과학, 실용 외에 문화 내지 인간 정신에 대해서 깊이 있는 훈도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영어와 수학이 아닌 다음에야 의례히 겉핥기식 교육만을 받지 않았던가. 아니 그것은 교육이라고 이름하기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문화와 인간 정신의 깊이를 헤아림 없이 아무데서나 실용의 이름으로 벌이고 있는 값싼 재건축 의식!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관념과 무지의 복합이 오늘날 이처럼 어마어마하고 참담하고 안타까운 사건을 불러일으키게 한 원인일 것이다. 거기에 스스로도 민망할 만큼 호들갑을 떨다가 불과 달포도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잊고 마는 우리의 성정(性情)! ‘채(蔡) 아무개 노인의 숭례문 방화’는 이런 우리들 자화상의 투사(投射)에 다름 아니다.

이제 사건이 난 지 2개월. 벌써 남들은 다 잊고 있는데, 문화재를 관리, 유지, 보호하는 사람들에게 정신교육이나 철저한 소방교육을 ‘아직’ 당면 과제로 꼽고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 단체가 있는가. 혹여 ‘설마 또 일어나겠는가’는 아닐까. 복원이라는 기막힌 마술상자가 있으니 그다지 신경 쓸 것 없다는 생각은 아닐까. 정말이지 이런 타성에 젖어 있지는 않은 것일까. 불은 그래서 났고, 언제 다시 날지 모른다.

우선 거기를 가 보자. 자유공원 남향 언덕 중턱에 앉은 좀 무뚝뚝하게 생긴 제물포구락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에는 요즘 ‘러시아의 달’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래서 제법 많은 관람객들이 드나든다. 내부는 호화롭게 리모델링을 했는데 예산 때문이었을까? 스프링클러가 없다. 구급 소화기는 몇 개 눈에 띄는데, 만약 저 높은 천정에서 발화하면 어떻게 하나? 다른 소화장비는 있는지, 비상벨 같은 것은 있는지, 무인감시카메라는 있는지, 그나마 소방, 방호교육 계획 같은 것은 있는지, 소방 점검은 수시로 나오는지, 그리고 안내를 맡은 여인 혼자서 유사시에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지. 다른 문화재들도 이럴 것인지.

설마 무슨 일이 또 일어나겠는가. 그런데 4월 3일 아침 9시, 충북 청원군 강외면 백운사 대웅전에서 화재가 또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