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성문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처럼 무협지를 끼고 다녔다. 수업 중, 교실 뒤편에 앉은 친구들은 무협지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몇 십 갑자의 내공을 갖춘 주인공이 건곤대나이법이나 검기상인(劍氣傷人)을 익혀 적을 제압했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소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부 잘하던 친구의 형님이 무협지 때문에 지방의 어느 산골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무협지에 대한 편견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현실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영웅들의 이야기와 책장을 넘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강한 중독성에 대한 거부감은 대학을 입학한 뒤로도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후회스럽다. 무협지를 읽을 시간에 공부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편견의 그늘이 깊어 독서와 상상하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놓쳤기 때문이다. 무협지는 독서가 주는 즐거움에 무엇보다 충실하다. 그 이상을 바라면 욕심이다.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운 나머지 편견을 강화하지는 않았을까? 무협지를 시작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