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나누는 경계인 보스포루스(Bosporus)해협 양쪽으로 국토가 나뉘어 있는 터키는 동양과 서양, 어느 쪽인지 우리를 자주 헷갈리게 한다. 해협 동쪽 끝자락의 이스탄불은 15세기 이전의 비잔티움이나 콘스탄티노플의 깊은 역사와 함께 이슬람 대사원 이미지와 동서양의 혼합 느낌이 어우러져 그 이름만으로도 비장(秘藏)의 도시로서 울림이 있다.
이스탄불을 소재로 한 현대무용 〈네페스Nef?s〉는 독일 무용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작품으로 그것의 한국 공연은 몇 가지 관심을 끌었다. 일단 20세기 현대무용의 전설로까지 소개되고 있는 피나 바우쉬가 그동안 적극 개척해온 탄츠테아터(tanztheater)무용극라는 춤 양식이 어떻게 이어져 오는지 궁금할 터이고, 게다가 이번처럼 세계 도시 시리즈의 일환인 〈네페스〉가 그려내는 이스탄불은 과연 어떤 이스탄불인지 호기심이 날 것은 당연하다.
피나 바우쉬의 명성은 세계 각지의 도시를 소재로 삼아 춤도 즐기고 도시도 알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되었다. 20년 전에 시작한 ‘세계도시 시리즈’는 그간 로마, 홍콩, 도쿄, 리스본 그리고 3년 전의 서울까지 열 서너 곳의 국제도시를 소재로 하며 계속적인 성과를 거둬 일석이조 기대치는 대체로 충족된 것 같다.

네페스는 터키말로 숨(쉬기)을 뜻한다. 작품 〈네페스〉가 무대로 끌어들인 것은 이스탄불 사람들이 숨쉬며 살아가는 퍽 일상적인 모습들이다. 〈네페스〉는 소박한 남자가 터키의 공중탕에서 목욕을 즐기는 장면으로 막을 연다. 터키인들에게 터키탕은 여가나 뜻깊은 행사가 이뤄지는 곳이다. 가령 신생아의 40일 기념잔치, 신부의 혼인 준비 과정에서 터키탕 입욕을 마치 통과의례처럼 중시하는 사회이니 만큼 그곳은 인간이 자연스레 숨쉬는 삶터의 상징이다. 선입견과 상업성에 휘둘리지 않고, 이스탄불 사람들의 아주 일상적인 그래서 보편적인 자취를 담아내는 〈네페스〉에서 이슬람 여성들의 두건인 히잡(hijab)은 물론 고려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가운데 갑남을녀들은 행복과 사랑의 순간들을 조각보 맞추듯이 이어나간다.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의 〈풀밭 위의 식사〉(1863)를 연상시키는 만남, 물장구질, 장난스러움과 고혹적인 행동들은 일상의 행복에서 존재의 가치를 되돌아보도록 하는 여운도 남긴다.

탄츠테아터는 근 한 세기 동안 춤을 중심으로 말, 노래, 레뷰(revue),1 일상 행동 등 춤 이외의 매체들을 결합한 장르로 진척되어왔다. 탄츠테아터의 주된 방식인 콜라쥬기법은 춤 작품이 내용과 형식에서 진폭을 확장하는 효과가 매우 컸다. 20년 전까지 탄츠테아터는 대체로 정치성, 사회성이 높은 춤 장르로 각인되었다. 피나 바우쉬가 전설적 현대무용가로 입신하게 된 연유도 1970년대 이후 기존 사회질서가 크게 동요하는 시기에 어느 춤 장르보다 정치성이 강한 탄츠테아터를 현대무용과 완성도 높게 결합했기 때문이다.

‘세계도시 시리즈’에서 탄츠테아터는 상당히 순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서울을 소재로 한 〈러프 컷Rough Cut〉, 리스본을 소재로 한 〈마주르카 포고Masurca Fogo〉 역시 이번의 〈네페스〉와 엇비슷하게 갑남을녀들의 일상을 담담하고 유머러스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구성되었다. 그러나 소재가 되는 도시의 특정한 내면을 내보이는 모습과 춤은 미미하다. 일례로 〈네페스〉가 이스탄불을 소재로 했다는 사전 지식이 없으면 오늘날 어디서나 흔히 접할 보통사람들의 꿈과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읽게 된다. 말하자면 일반적 즐거움을 위해 특정 지역의 내면이 소홀히 다뤄지고 그리하여 구체성이 약화됨으로써 세계도시 시리즈가 던지는 공감대는 사실 미적지근하다.

다른 춤 장르에 비해 완고했던 탄츠테아터의 결기를 ‘세계도시 시리즈’에서 감지하기는 어렵다. 서정적 분위기와 여성스러움을 유머러스하게 접근하는 융통성은 이 시리즈가 탄츠테아터에 부여하는 또 하나의 미덕으로 수용된다. 반면, 감상에서의 내적 깊이보다 편안하며 상식적인 수용에 치중하는 것은 탄츠테아터를 희가극 수준으로 밀어낼지도 모른다. 〈네페스〉에서 그의 상상력은 분명 노쇠했고 그의 탄츠테아터 역시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보인다.

이미지 제공_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