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치는 것은 쉬워도 성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攻城容易守成難).” 옛 말은 역시 그른 데가 없는 모양이다. 〈리니지Lineage 3〉의 기술 유출사고와 함께 ‘온라인게임 왕국 한국의 위기’가 얘기된 지도, 그래서 온라인 인프라와 더불어 느닷없이 굴기(?起)한 이 작은 왕국의 미래를 점치는 너스레를 떤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1년 전의 그 너스레에서 나는 감히 동아시아 서사로서의 전기(傳奇)초자연적 사건을 주로 다룬 동아시아 전통서사 양식와 문화코드로서의 무협(武俠)이 한국형 온라인게임, 곧 다중접속온라인게임(MMOG, Massively Multi-playing Online Game)의 문법을 만드는 기반이 될 거라고 낙관했었다. 미국과 일본이라는 게임대국의 틈바구니에서 ‘10년이라는 눈 깜빡할 사이’ 황무지 위에 이룩한 위대한 ‘창업(創業)’의 기적을 떠올린다면, 비록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우나마 ‘온라인게임 왕국’의 가능성은 아직 열려있다는 희망의 말이기도 했다.

작년을 돌아보건대, 두 태두(泰斗)의 존재는 엄연하고 새로운 추격자의 공격은 벌써 숨 돌리기조차 버겁다. 무림(武林)의 태산(泰山)과 북두(北斗)로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을 꼽는 것처럼, 게임산업에서는 개인용 컴퓨터와 콘솔(console)입출력 장치 일반을 지칭을 양분한 미국과 일본을 꼽는다. 다른 한편, 놀라운 속도로 거대 온라인 네트워크를 조직화한 중국은 2008년을 기점으로 한국게임을 넘어서는 ‘규모의 경제’ 전술을 펼칠 것이 예상된다. 이미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중국게임에 대한 한국의 우세는 절대적이지 않다. 이런 마당에 아직도 게임의 새로운 콘텐츠로 무협(武俠)을 말하는 일이 과연 가당키나 할까?

한국에서 게임이 처음으로 산업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확장 가능성은 ‘무협’의 코드와 함께 조심스럽게 점쳐졌다. 중세 판타지 일변도에 물린 나머지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던 개발자들은 중국어 문화권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무협이라는 하나의 코드를 관통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전통극으로부터 드라마, 영화, 게임에 이르는 거의 모든 문화장르에서 무협은 상대적으로 경쟁력 있는 이 지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마스터키였고, 수출 의존적 산업구조를 벗어날 수 없던 한국의 게임 업계는 선택의 여지없이 이 흐름을 받아들였다. 〈영웅〉이나 〈미르의 전설 2〉, 〈창천(蒼天)〉 같은 게임이 해외에서 거둔 성공은 이러한 선택의 ‘은혜받은’ 결과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국내에는 〈스타크래프트Star Craft〉와 〈리니지Lineage〉의 벽을 넘는 대작 게임이 없었다. 무협게임은 언제나 소수의 마니아를 위해 존재했다. 심지어 “무협게임은 재미없다”가 유저(user)들 사이의 정평이었다.

무협게임의 역사는 먼저 진 용(金庸)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타이완발(發) 롤플레잉게임(RPG, Role Playing Game)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RPG들은 원작에 기대어 소설 속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환상적인 그래픽은 눈길을 끌었지만,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는 신통치 않았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그 때문에 등을 돌렸다. 〈영웅〉이나 〈십이지천(十二之天)〉같은 한국 무협게임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한 것은 MMOG를 즐기는 한국 유저들의 취향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를 배경으로 한 다중접속온라인롤플레잉게임(MMORPG, 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과 이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리니지〉의 기사들은 서양 무기와 마법을 휘두르고 〈십이지천〉의 협객들은 초식과 기공을 쓰지만, 유저들이 느끼는 것은 그래픽과 음악 같은 부수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개인전과 단체전의 전투 양상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두 부류의 게임은 ‘서양의 중세’라는 하나의 우주에서 벌어진다. 〈리니지〉의 기사들과 〈십이지천〉의 협객들을 한 서버 위에 올릴 수만 있다면 ‘수퍼맨 대 베트맨’과 같은 세기의 대결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수퍼맨의 우주에서 배트맨이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할 나약한 인간인 것처럼, 혈맹과 길드가 좌우하는 세계에서 ‘협객(俠客)’들은 영원히 2인자일 뿐이다. ‘무협게임의 세계’는 결코 ‘무협의 세계’일 수 없다. 그것은 서양 중세의 세계관 위에 덧씌워진 무림의 그림자일 뿐이다. 실재하는 게임 속에서 무협은 이렇듯 절멸(絶滅) 직전이거나 지리멸렬하다. 도대체 MMOG에 무협의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MMOG에는 무협과 무협의 세계인 강호(江湖)가 존재한다.

개인용 컴퓨터든 게임 전용 콘솔이든 이동통신 단말기든, 플랫폼(platform)의 종류에 관계없이 한국에서 인기몰이 하는 게임은 ‘사람 대 기계’의 형태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의 양상을 띤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이 게임 형태는 이미 전 세계적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이제 어떤 유저도 더 이상 골방에 갇혀 기계와의 ‘은밀한 대결’을 즐기지 않는다. 기계와의 대면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첫 걸음에 불과하다. 이른바 ‘랩업 노가다(레벨 업을 위한 단순 노동에 가까운 플레이)’에 대한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도 〈리니지〉나 〈십이지천〉 같은 MMORPG가 건재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사람끼리의 접촉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있다.

〈리니지〉와 〈스타크래프트〉가 순위를 다투기 시작한 것은 벌써 10년도 더 되어가는 일이다. 아마 이 게임들은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순위를 지킬 것이다. MMOG의 세계는 아직 그 유저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때 동시접속자수 20만을 기록했던 유저들이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게임에 홀려있던 유저들은 짧은 ‘바람’이 자고 나면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로 돌아온다. MMOG는 유저들이 형성한 관계망 위에서만 작동한다. 그러므로 먼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쪽이 언제나 이긴다. “사람이 있으면 세계가 있다(人在處處江湖).” 그것이 바로 강호의 법칙이다. 다시 말해, MMOG가 있는 한 강호가 존재한다. 아니, 강호가 없다면 MMOG가 존재할 수 없다. MMOG는 유저들의 네트워크에 의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무협의 세계, 강호는 본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저 광활한 중원 땅 어딘가에 덩그마니 존재하는 아스라한 이상향이 아니라, 강호의 법칙을 맹세로 받아들이고 몸으로 행하는 ‘협객’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네트워크, 그 자체다. 그래서 강호는 여기 존재하는 동시에 저기도 존재한다.

그 세계에 접속하는 누군가가 없다면 강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협객이 없다면 강호도 없다. 강호는 협객을 만나고 접촉하는 순간 생겨나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가상현실의 세계(cyber world)인 것이다. 그러므로 강호의 법칙은 소림과 무당이 있는 MMOG 속의 중원 무림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MMOG가 구동되는 이 현실 전체를 지배한다. 법칙을 아는 자는 흥하고, 모르는 자는 망한다. 이는 정해진 이치다.

그렇다면 무협은 한 줌 모래로 사라질는지 모르는 이 온라인게임 왕국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나는 MMOG 고유의 ‘게임문법(grammar of games)’, 곧 고유한 게임서사와 그 서사를 구동할 수 있는 엔진과  서버의 개발이 그 답이 될 거라 예견했다. 우리만의 서사와 그 서사에 안성맞춤일 게임의 법칙을 고안할 때 이 작은 왕국은 난공불락이 되리라. 허나 어쩌면 이 왕국에 필요한 것은 보루와 해자가 아닐는지 모른다. 말달리는 민족에게는 애초부터 보루와 해자가 아니라, 길든 말과 튼튼한 발굽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길은 어디로든 이어져 있고, 사람이 있는 한 어디나 강호니 말이다. 유저가 있고 그들의 네트워크가 있는 한 무협과 무협의 세계는 1인칭슈팅게임(FPS, First Person Shooting)에도 있고 RPG에도 있고 실시간시뮬레이션게임(RTS, Real-time Strategy)에도 있다. 그들이 말달려 갈 ‘다음’은 어딘지 모르나, 보루를 쌓고 해자를 쌓는 이들이 이를 수 없는 경지가 ‘거기’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