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원의 『한국무협소설사』(2008)로 인해 우리는 한국무협소설이라는 독자적인 영역과 그 역사에 관한 연구서를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창작·번역된 무협소설과 그에 관한 평론 및 연구를 최초로 망라했다. 저자는 한국무협소설이 중국무협소설의 단순한 번역 또는 번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 기원을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까지 소급하여 영웅소설이나 군담소설에서 무협소설의 맹아를 발견하려 한다. 그리고 중국무협소설의 영향과 무관한 일제시대의 역사무예소설을 그 후예로 삼고 1980년대의 창작 무협소설과 1990년대의 신무협1을 그 ‘창조적 계승’으로 설정하며 그 흐름을 ‘한국적 무협소설’로 명명한다. 한국무협소설은 바로 이 ‘한국적 무협소설’과 중국무협소설을 모방하여 창작한 ‘중국식 창작 무협소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박영창은 「중국 무협지 번역의 역사」에서 한국무협소설을 김광주, 워 롱성(臥龍生), 창작무협, 진 용(金庸), 재판중국무협, 창작무협의 부흥이라는 여섯 단계로 나누었는데, 절반이 중국무협소설의 번역 및 번안이고 나머지 절반 가운데 하나가 모방이다. 한국무협소설은 중국무협소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진원의 저서에서도 기원을 모색하는 1장과 2장을 제외한 3장과 4장의 12절 가운데 ‘한국적 무협소설’과 직접 연관된 부분은 14장 ‘80년대 무협소설의 새바람’, 18장 ‘한국적 무협소설, 그 모색의 길’, 19장 ‘신무협의 등장’, 20장 ‘판타지와 신무협의 공존’으로 모두 네 장뿐이다. 영향 관계를 서술한 12장 ‘중국·일본 무협소설의 영향 속에 성장한 한국무협소설’까지 포함해도 다섯 장에 불과하다. 한국무협소설이 순수 창작만으로 자신의 역사를 구성하기에는 아직 빈약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무협소설사』에서 중국식 창작 소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중국무협소설 번역·수용의 역사를 서술 범위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진원과 달리, 전형준은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2003)에서 한국무협소설의 외연을 무작정 확대하기보다는 그 독특함을 챙긴다. 오랜 기간 문학평론에 종사해온 그에게 무협소설에서 ‘한국적’ 정체성을 모색하는 시도는 ‘서유럽 지향적 무의식’과 ‘민족주의적 무의식’의 공모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좌백 이후 한국의 무협소설을 신무협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워롱성, 진 용, 구롱(古龍)에 대한 전복으로 규정하면서 그 문화적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후속작업이랄 수 있는 『한국무협소설의 작가와 작품』(2007)에서 전형준은 무협소설이라는 장르문학을 ‘문학’으로 승격시켜 진지하게 ‘평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전복’이 명실상부한 ‘전복’인지는 대조가 필요하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신무협은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이라는 기존 무협소설의 틀을 초월하거나 전복하고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실존적 탐구를 나름대로 의미 있게 수행했다.”2 뿐만 아니라 신무협은 문학 수준의 향상, 내용과 형식면에서의 독자성, 근현대성과 포스트근현대성 그리고 문화적 동시대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 진영의 진지한 평론가가 ‘삼류문화의 온상’이었던 무협소설을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놀라운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무협이 전복했다고 하는 대상으로 한국의 무협소설 외에 중국무협소설 작가들까지 포함한 것은 섣부르다. 특히 1980년대 중국대륙의 캠퍼스를 점령한 뒤 1990년대에 경전화(經典化)한 진 용의 작품과 관련해, 한국 신무협이 전복한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최소한 신무협의 전복적 내용이 진 용의 작품에서 발견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과연 그럴까?

무협소설이라는 장르는 ‘중국적’ 성격이 강한데다 한국무협소설에 대한 영향도 지대하다. 따라서 한국무협소설의 역사를 기술할 때 그에 대한 적절한 언급은 필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글들에서 중국무협소설에 대한 오해가 종종 나타난다. ‘김용’의 『소설 영웅문』을 중국무협소설의 대표로 간주하고 그것을 독파하면 중국무협소설을 정복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 진 용의 『사조삼부곡(射雕三部曲)』을 번역한 『소설 영웅문』은 완역이 아니라 70퍼센트 수준의 번역이었고 그 문체라든가 문화적 측면까지 평가하면 완성도가 50퍼센트 이하인 번역물이다. 그러므로 ‘김용’의 『소설 영웅문』은 진 용의 『사조삼부곡』과는 다른 별개의 텍스트인 셈이다. 김광주의 『정협지』를 번안 내지 창작소설이라 한다면, 『소설 영웅문』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번안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영웅문』의 출판은 한국적 맥락에서 이전 단계의 무협지에 대한 통념을 깨뜨린 사건이었지만, 중국적 맥락에서는 원작의 의미와 재미를 상당히 훼손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한국의 『소설 영웅문』 현상에서 이상한 점은 진 용의 작품이 완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여전히 『소설 영웅문』에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소설 영웅문』의 원작인 『사조삼부곡』이 흥미로운 작품인 것은 틀림없지만, 문화적 측면에서는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로 이어지는 후기 대작들이 훨씬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유가적 협객(원승지, 곽정), 도가적 협객(양과), 불가적 협객(장무기)을 거쳐 협객의 일반적 의미에서 벗어난 비협(非俠)적 인물(적운, 석파천)과 심지어 시정잡배에 가까운 반협(反俠)적 인물(위소보)로 변천해가는 협객 주인공의 계보만으로도 그 전복적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수많은 역사 사실과 문학작품 그리고 문화적 요소들이 충만하다. 중국불교에 입문하려면 진 용의 작품을 읽으라는 베이징대학 교수 천 핑위앤(陳平原)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송말부터 명 건국까지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사조삼부곡』에서 시작하고 명말 청초의 역사 공부는 『녹정기』와 함께 하면 좋을 것이라는 권유는 필자의 심득(心得)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은 장르문학으로서의 무협소설 읽기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중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진원과 중문학 연구자이기도 한 전형준의 저서에서, 진 용의 ‘원작’을 통독했더라면 거론됐을 법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김용’의 『소설 영웅문』(원문 기준 각 4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소오강호』(4권), 『천룡팔부』(5권), 『녹정기』(5권) 등의 대작 장편 정도까지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진 용 작품의 문화적 두터움이 이들 6부작에 구현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검은구록』(2권), 『벽혈검』(2권), 『설산비호』(1권), 『비호외전』(2권), 『연성결』(1권) 등의 장편과 「월녀검」(30면), 「원앙도」(52면), 「백마소서풍」(104면) 등의 중단편을 빼고 진 용의 작품세계를 운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중화권에서는 1990년대부터 진 용의 소설을 연구하고 교육하면서 이른바 ‘경전화’ 작업을 진행했고 전문 연구서만 해도 100여 권을 헤아리면서 진쉬애(金學)3란 신조어까지 출현하고 있다. 1993년 베이징대학에서 진 용에게 명예교수직을 수여하고 싼롄서점(三聯書店)에서 『진용작품집』(전35권)을 출간한 것은 그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베이징대학과 싼롄서점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수의 대학이고 출판사이다. 중화권에서 진 용의 작품은 무협소설에서부터 애정소설, 역사소설, 문화적 텍스트 등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읽힌다. 한국의 『소설 영웅문』 현상은 그 스펙트럼에서 무협소설 요소만을 가져와 조악하게 재구성한 텍스트에 의존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환영을 받았던 한류(韓流)가 이제 포스트한류를 고민하고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동아시아에서 광범하게 수용되고 있는 문화횡단의 시대에, 진 용의 작품도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때 진 용 작품의 ‘문화적 두터움’은 동아시아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 콘텐츠이기도 하지만, 자칫 ‘중화주의 서사’와 ‘중국 상상’을 강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