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진취앤, 사람의 몸을 붓 삼아 획을 긋다
  1950년대까지 카메라의 움직임과 효과, 스턴트, 인물대결까지 일본 사무라이영화를 흉내 낸 것에 불과했던 홍콩무협영화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만의 미학을 갖게 된다. 그 계기는 후 진취앤(胡金銓, 1931~1997)의 등장이었다. 〈대취협(大醉俠)〉(1966), 〈용문객잔(龍門客棧)〉(1966), 〈협녀(俠女)〉(1969)로 이어지는 그의 영화들은 무협영화가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후 진취앤 영화의 유려한 무술 장면이 중국의 전통무술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베이징에 뿌리를 둔 경극(京劇) 즉, ‘베이징오페라’를 영화에 도입한 것이다. 그렇다고 경극이 무술과 무관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가령 경극에서 자주 활용되는 점보번신(点步?身), 즉 팔을 날개로 활용하면서 한쪽 다리를 축으로 하고 반대편 다리 발끝은 회전하기 위해 바닥을 찍으면서 도는 이 동작의 경우 경극에 나오는 많은 무술동작 가운데 하나이다. 후 진취앤의 영화 중 많은 작품이 객잔(客棧)중국식 숙박시설 등의 실내 공간에서 사건을 전개시키는 것은 이러한 경극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무협영화를 경극 동작의 영화화로 한정지을 수 없다. 물론 〈대취협〉, 〈용문객잔〉, 〈영춘각지풍파(迎春閣之風派)〉(1973), 〈공산영우(空山靈雨)〉(1979)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듯 그는 자신의 영화 대부분의 마지막 대결 장면을 중국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실외에서 전개시킨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후 진취앤 영화의 경극적 요소가 영화적으로 가장 완전하게 승화되는 것은 다시 말해, 그의 무협영화가 중국적 전통과 완전하게 맞닿게 되는 것은 실내에서 야외로 이동했을 때이다. 이러한 이동은 후 진취앤 영화가 경극의 세계에서 회화의 세계(또는 서예의 세계)로 전환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물의 움직임이 마치 화폭 여기저기서 힘차게, 때로는 유려하게, 또 때로는 섬세하게 획을 긋는 붓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협녀〉의 대나무 숲 대결 장면은 중국 회화의 전통을 영화적인 것으로 승화한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종(縱)과 횡(橫), 정(靜)과 동(動)이 어우러지는 회화 이상의 영화적 운동 말이다. 이렇듯 후 진취앤은 몸이라는 붓으로 획을 긋는 사나이였고, 그럼으로써 중국 전통의 무예와 연극(경극), 그리고 회화가 공존하는 무협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장 처, 피와 죽음에 매료된 사나이
장 처(張徹, 1923~2002) 역시 1960년대에 등장해 홍콩영화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의 영화는 후 진취앤과 달리 쿵후나 검협(劍俠)물에 해당하는 영화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무협영화를 엄격히 분류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닌 만큼 넓은 맥락에서 무협, 검협, 쿵후를 무협의 범주로 아우르며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장 처는 음모, 배신, 복수에 초점을 맞춘 서사 속에 피로 물든 잔혹 이미지에 매료된 감독이었다. 〈외팔이 검객(獨臂刀)〉(1967)에서 완성된 그만의 스타일은 피로 물든 죽음의 세계를 예찬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장 처 영화의 주인공 대부분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은 그가 비장미의 완성을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영화에서 맨손으로 눈을 멀게 하고 흰 옷이 처참하게 피로 물드는 것 정도는 얌전한 편에 속한다.〈복수〉(1970) 심지어 주인공의 몸이 두 동강 나거나,〈신독비도(新獨臂刀)〉(1971) 달리는 말에 이끌려 몸이 사지절단, 아니 오지절단(머리 포함) 나는 장면〈13인의 무사(十三太保)〉(1970) 등은 장 처 영화만의 잔혹영상이라 할 만하다. 우 위썬(吳宇森)이 〈자마(刺馬)〉(1973)에서 장 처의 조감독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피로 물든 홍콩느와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장 처만큼 주인공을 처참하고도 비장하게 죽일 수 있는 감독도 없는데,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그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은 두 남자 간의 무술 대결이라기보다는, 그 대결 과정에서 신체 절단으로까지 나아가는 폭력의 극한을 경험할 수 있는 데 있을 것이다. 장 처의 영화를 ‘폭력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는 폭력의 구조에 사로잡힌 그의 인물들은 폭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복수〉에는 디 롱(狄龍)과 쟝 다웨이(姜大衛)가 동시에 출연하는데, 디 롱이 영화의 시작과 함께 죽어버린다(충격!). 그 후 동생 쟝 다웨이는 형의 복수에 성공하지만, 그 역시 처참히 죽고 만다(또 충격). 어쩌면 〈복수〉는 하룻밤에 두 번의 거친 섹스를 한 느낌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 뿜어나오는 시뻘건 피의 향연과 그 고통의 쾌락이 성적 오르가즘의 순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내가 변태라서 갖는 느낌이 아니다. 마치 오르가즘 이후 갑작스럽게 수축되는 몸-감각의 재현과도 같은 피의 분출과 갑작스러운 엔딩 크레딧, 그것이야말로 장 처식 폭력의 오르가즘일 것이다.

리 샤오롱과 청 롱, 몸의 전시와 희극화
장 처와 함께 홍콩영화는 전통무예의 사실적 재현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장 처의 영화에서 곧잘 등장하는 단검을 상기해보라. 이는 두 사람의 몸이 서로 엉켜 뒹구는 싸움의 사실적 재현을 위한 것이지, 멋들어진 무예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후 진취앤과 장 처의 영화가 조금씩 시대의 뒤편으로 밀려나기 시작할 무렵인 1970년대에 이러한 분위기를 극대화한 새로운 무협의 세계가 등장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이가 바로 괴조음(怪鳥音)의 원조이자 대가인 리 샤오롱(李小龍, 1940~1973)이다.

리 샤오롱의 등장과 함께 홍콩무협물은 몇 가지 변화를 보이는데, 1960년대 무협영화가 후 진취앤, 장 처, 추 위앤(楚原) 등 감독 중심이었다면 1970년대 무협영화는 리 샤오롱의 등장과 함께, 실제 무술실력을 갖춘 스타 중심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이는 리 샤오롱의 죽음 이후, 청 롱(成龍)이 그 자리를 대신함으로써 1980년대까지 지속한 현상이었다. 이 전환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이전 배우들이 정통 무예가 아닌 경극에 바탕을 둔 반면, 리 샤오롱은 진짜 날 것 그대로의 무술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리 샤오롱의 성공이 단지 그의 탁월한 무술 솜씨 덕분만은 아니었다. 〈당산대형(唐山大兄)〉(1971)으로 스타의 반열에 올라서기 이전 리 샤오롱은 자신의 무술 솜씨 하나를 믿고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지만, 참담한 결과를 얻고 홍콩에 돌아와야 했다. 리 샤오롱은 〈당산대형〉, 〈정무문(精武門)〉(1972), 〈맹룡과강(猛龍過江)〉(1972), 〈용쟁호투(龍爭虎鬪)〉(1973)의 연이은 성공에 갑작스러운 죽음이 겹치면서 신화적 인물이 되지만, 또한 그로 인해 쿵후영화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 것이 바로 청 롱을 중심으로 한 쿵후코미디이다. 청 롱은 〈취권(醉拳)〉(1978)으로 본격적인 인기몰이를 시작한 이후 쿵후와 코미디를 결합한 장르를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그는 쿵후를 유지하되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긴 〈쾌찬차(快餐車)〉(1984), 〈폴리스 스토리Police Story〉시리즈(1985~1996)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입지를 다진다. 하지만 청 롱은 쿵후를 무술이 아니라 하나의 스턴트 쇼에 가까운 것으로 변질시킨 주범이기도 했다. 즉, 쿵후가 중국의 전통무예가 아닌 서커스 같은 볼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무언가를 볼거리로 전시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영화의 자연스런 생리다. 중요한 것은 청 롱의 이러한 전략이 이후 SF무협영화로 이어지며, ‘무협의 수단화’ 현상을 가속화했다는 점이다.

SF무협영화, 동서양의 결합 혹은 무국적 판타지
SF무협영화의 시작은 쉬 커(徐克)의 〈촉산(蜀山)〉(1983)이다. 이 요상한 영화는 중국적인 것을 세계적이고 현대적인 테크놀로지로 어떻게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모범답안이었다. 물론 이때 ‘중국적인 것’은 탐구의 대상이 아닌 이국적 풍경의 전시를 위한 것이다. 〈촉산〉에 이어 중국적인 것을 재현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무국적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 SF무협영화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작품은 〈천녀유혼(?女幽魂)〉(1987)이다. 어린 시절 내 가슴을 녹였던 왕 주셴(王祖賢) 주연의 〈천녀유혼〉은 〈촉산〉의 가능성을 확신으로 변모시켜준 결정적 계기였다. 이후 홍콩무협영화는 〈소오강호(笑傲江湖)〉(1990), 〈동방불패(東方不敗)〉(1991),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1992), 〈백발마녀전(白髮魔女傳)〉(1993) 등을 쏟아내며 1960년대에 버금가는 무협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연다.

물론 이 시기를 상징하는 배우로 린 칭샤(林靑霞)를 들 수 있다. 린 칭샤의 중성적 매력은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그녀의 이러한 중성적 캐릭터야말로 무협영화의 무국적 상황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낸다. 남자이지만 남자이지 않고 여자이지만 여자이지 않은 린 칭샤와 무국적 판타지로서 SF무협영화의 처지는 그리 다르지 않다. SF무협영화는 홍콩무협영화를 부활시키며 과거의 영광을 되돌려주었지만, 그 대가는 무협의 상실이었다. SF무협영화에서 무협은 후 진취앤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세계가 더 이상 아니다. 청 롱이 쿵후를 스턴트로 활용했듯이, SF무협영화의 무협은 테크놀로지의 전시를 위해 차용된 도구적 소재에 불과했다. 중국의 기표로 기능할 수 있다면 무협의 역할은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황비홍, 무협영화의 시작으로 끝을 맺다
홍콩무협영화는 사이클이 그리 길지 않다. 물론 이는 홍콩 장르영화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SF무협영화의 기술적 판타지가 식상해질 무렵, 기술적 효과를 최소화하고 진짜 몸으로 부대끼는 무협영화가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영화적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SF무협영화를 대체한 것은 〈황비홍(黃飛鴻)〉(1991)이라는 아날로그적 무협영화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1990년대에 〈황비홍〉의 인기를 되살린 장본인이 바로 SF무협영화의 기수 쉬 커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황비홍〉은 중국무협영화가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뒤돌아보는 고향과도 같다. 홍콩무협영화는 실제로 〈황비홍〉과 함께 시작했다. 1949년 처음 등장한 이후 100편이 넘게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황비홍〉이 홍콩무협영화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황비홍〉의 부흥은 홍콩의 지역적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대부분이 광동인(廣東人)인 만큼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협객 황 페이홍(黃飛鴻, 1847~1954)무술인, 의사. 영화 〈황비홍〉의 소재가 된 실존인물은 그 누구보다 대중적 흡입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초중반의 〈황비홍〉 열풍이 광동인들의 향수에 편승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인기는 중국반환(1997)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앞둔 홍콩의 지정학적 특수성으로부터 비롯된 측면이 있다. 즉, 〈황비홍〉을 통해 ‘중국적인 것’을 되살려 자신의 뿌리를 상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깃든 ‘서구적인 것’에 대한 불안함의 표현이다. 밀려오는 서구문물 앞에서 온몸을 무기로 싸우는 황비홍의 모습에는, 리 롄졔(李連杰)의 놀라운 무술 솜씨로 가려져 있긴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공허함이 배어있다. ‘서구에 저항하는 황비홍’은 ‘내 안의 서구’를 밀어내려는 홍콩인들의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홍콩의 중국반환과 함께 홍콩무협영화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와호장룡(臥虎藏龍)〉(2000)의 전 세계적 성공은 무협영화가 지닌 상품가치를 재확인시켜주었고, 중국의 5세대 감독들은 할리우드에 대항하는 양식으로 무협영화를 선택했다. 그 선두주자는 다름 아닌 장 이머우(張藝謀)였다. 〈영웅(英雄)〉(2002)에서 시작해 〈연인(十面埋伏)〉(2004)과 〈황후화(滿城盡帶黃金甲)〉(2006)를 거치며, 장 이머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항하기 위해 무협의 세계로 향한 것이다. 이러한 장 이머우의 전략은 일종의 ‘흉내내기’라 말할 수 있는데, 흉내내기의 저항이 먹혀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원본과 닮아야 하지만 원본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차이를 구현했을 때 흉내내기의 저항성이 발생하니까 말이다. 장 이머우 영화에서 이러한 차이를 규정해주는 것이 바로 무협이라는 중국 전통의 요소이다. 그에게 중국무협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유사한 스펙터클을 창조할 수 있는 동력이자 할리우드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차이의 대상이다. 즉, 장 이머우가 담아내는 것이 ‘상상된 중국’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이 시뮬라크르(simulacre)적인 중국의 이미지가 현재의 중국사회를 위협하는 서구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한다는 장 이머우식 자기 정당화를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이라는 장 이머우 영화의 중핵적 요소이다. 레이 초우(Rey Chow)는 일찍이 장 이머우 영화의 중화사상적 요소들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5세대 시절 중국정부와 대립하면서도 결국에는 정부와 한 지점에서 정을 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장 이머우가 무협을 차용하는 것이 할리우드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한편으로는 다수의 소수민족이 결합한 중국사회를 한족 중심으로 강화하기 위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후 진취앤에서 시작한 무협이 장 이머우까지 이어졌을 때, 우리는 사람이 팔을 벌려 사람을 끼고 보호하는 형상의 ‘협(俠)’이 오히려 다수의 소수민족을 한 지붕 아래로 가둬두려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감을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