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부터 13년까지 연재된 웹툰 <미생: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이하 <미생>)는 최근에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다. 드라마 <미생> 제작진은 원작을 몇 십 번이나 읽고, 더불어 그 동안 한국 사회에서 화제가 된 『피로사회』, 『현시창』 등 사회를 다룬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도 사치라는 얘기에선 자괴감을 느끼고, 현실을 어설프게 다루면 모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2010년대 현실에 밀착하고자, 또한 실제 직장인들의 삶을 기만하지 않는 ‘회사 생활 드라마’를 만들고자 한 제작진의 노력은, 100퍼센트 현실적이진 않더라도, 많은 대중들이 공감하는 문화 콘텐츠로서의 <미생>을 탄생시켰다.

<미생>은 어릴 적부터 프로 바둑기사를 꿈꾸던 ‘장그래’라는 인물이, 꿈이 좌절된 후 회사에 입사해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드라마 속에서 장그래를 맡은 배우는 임시완이다. 장그래, 아니 정확히는 장그래 역을 맡은 배우 임시완의 옷매무새, 그의 ‘정장 핏fit’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작은 키에 몸집도 자그마한 그는, 확실히 정장 차림에는 영 ‘폼’이 나지 않는 몸매를 지녔다. 아이돌이라는 배우 임시완의 본업에 맞게, 후드티와 청바지, 스니커즈로는 더할 나위 없지만 정장은, 아무래도 아니다. 강 대리나 장백기를 맡은 타 등장인물들에 비한다면 볼품이 없다. 입사 첫날, 입고 갈 정장이 없어 아버지 양복을 입은, 그야말로 ‘아빠 옷 입은 아들’ 모습보다는 훨씬 낫지만, 여전히 정장을 입은 그는 어정쩡하고 어색해 보인다. 새로 사 입은 정장 바지도 어딘가 커 보이며, 어리고 여린 얼굴까지 더해져, 임시완의 장그래에겐 한 마디로 정장이 어울리지가 않는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배우-복장의 미스매치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장그래의 존재론적 위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 같기도 하다. 옷의 첫 번째 목적이 신체의 보호, 두 번째 목적이 신분의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확실히 그러하다. 장그래는, ‘원 인터네셔널’이라는 대기업 사원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마치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양, 남의 집에 잘못 들어선 양, 사실 그 옷, 그리고 그 위치에 ‘미스매치’된 것이다. 고졸의 장그래, 어떤 경력과 스펙도 전무한 20대. 물론 그럼에도 그는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신입이라고 하기엔 눈부신 활약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 척척 해내는 PT와 기획서 작성실력을 지닌 최고 스펙의 동기들과 비교해서도 밀리지 않는 ‘상사맨으로서의 능력’이 돋보인다. 그렇게 그는 직속 상사에게 존재를 인정받고, 동료들과의 ‘우리됨’을 느낀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샤를 보들레르, ‘취하라’(Enivrez-vous) 중에서

일에, 인정에, 성취에 취할 때면 마치 하늘을 나는 듯 하지만 땅에 발 딛고 돌아오면, 그러나 현실이 펼쳐진다. 어디까지나 그는 2년 계약직 사원일 뿐이다. 명절 선물로 정직원들이 스팸 세트를 받을 때에 상자조차 반 크기의 식용유를 받고, 다른 팀에게까지 탐나는 신입이라도 필요가 없어지면 ‘부담 없이 버릴 수 있는’, 2년까지 일회용 계약직이다. 2년이 지나면 곧 회사에서 사라질, 시한부 노동자이니 말이다. 원인터란 회사에서 재계약은 전례가 없다. 그 흔한 ‘능력주의’란 말은 이럴 때 보면, 전혀 발휘되지 않는 개념 아닌가. 능력과 성과로만 치면 정직원이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생>이라는 서사가 현실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한 물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굳이 ‘미생이 현실적인가’ 묻는다면, 아니,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일단 고졸이 한국에서 몇 위 안에 드는 대기업 인턴이 되고, 입사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부터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그는 ‘낙하산’이다. 하지만 저렇게 신선한 낙하산이 있을까? 실제로 그에겐 그 어떤 도움이 될 ‘빽’도 배경도 없다. 그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오래된 집에서 공공근로를 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도왔다. 그나마도 어머니는 이제 아들의 취직으로 인해, 공공근로 자격마저도 잃었을 것이다. 그는 극히 특수한 조건의,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낙하산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대도 지금의 ‘2년 계약직’마저 대부분에게는 불가능한 기회임은 분명하다. 비록 ‘무늬만 낙하산’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그에게 기회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와, 행운은 ‘거기까지’일 것이다.

그의 상사 오 과장의 말처럼 오직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장그래와 비교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을 하는 수많은 청년들이 있다. 그렇기에 그가 정직원이 되는 일은 체계상으로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공평하며, ‘정의롭지’ 않다. 초기 인턴 시기에 동기들이 장그래를 향해 노골적인 멸시의 눈초리를 보낸 것도, 지금과 같은 경쟁시대에서는 정당한 분노일 것이다. 그들은 이 자리를 위해 수 백 개의 입사원서를 썼을 것이며 그 원서를 쓰기 위한 과정은, 그보다 더 지난했으리라. 그들에게 장그래는 그들이 믿어온 약속과 정의와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는, 인정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미생>이 최소한의 상식선에 기반 한 이야기임을 고려한다면, 주인공의 비현실성은, ‘거기까지’여야 마땅하다.

그가 속한 영업 3팀이라는 곳은 또 어떠한가. 능력과 성품을 모두 지닌 직속 상사 오 과장과 김 대리는 모두가 원하는 일/인생 선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의 팀은 한마디로 ‘공동체’적이다. 이러한 곳에서라면 ‘성장’이라는 간지러운 말을 꺼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입사원의 아이디어도 중요하게 경청하고, 감정 상태를 배려하며, 그를 ‘위한’ 행동을 하는 상사는, 모두가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개인의 능력 문제로 소급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나는, 한 선배에게 ‘영업 3팀과 같은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는데, 구조조정에 의해 손발이 모두 잘려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 한 마디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내부의 개인들이 아무리 공동체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길 원한다고 해도, 심지어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구조가, 절차가, 체계가 이를 방해한다. 적어도 체계 내에 있는 한, ‘생사여탈권’은 회사라는 체계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 속 개인들의 고군분투는 생존의 위협 앞에서 무기력하다. 회사 내에서 나의 기본적인 생존조차 불확실한데, 누군가를 어떻게 이끌어가고 지켜줄 수 있을까.

그렇기에 <미생>에 ‘취하라’는 보들레르의 시가 인용된 것은 상징적이다. 실제로 영업3팀 사람들은 자주 취해 있는 듯해 보인다. 일에 도취돼 있거나, 술에 취한다. 빈번하게 술에 취하는 것은 영업팀이라는 업무 성격 탓도 있을 것이고, ‘전우애’와 같은 동료애를 다지는 회식이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주 남을 접대하거나 일의 괴로움을 잊느라 취하며, 가끔은 기분 좋아서 취한다. 그들에겐 정말로 ‘취하는 순간’이 없다면, 그 일을 계속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술이든, 일에든, 빛나는 순간에든 취해있지 않으면 그들의 노곤한 현실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취하는 행위 자체가, 힘겨운 노동하는 삶의 알레고리다. 그러나 취한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기약된 행위이며, 중독자가 아닌 이상 현실과 현실 사이 일시적 시간이다. 취한 환상에서 맨 정신의 현실로 되돌아오는 순간, 더 이상 현실은 빛나지만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술이든 담배든, 혹은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챙기는 보상에든, 그 환각에 기대어 현실을 잊고, 취기에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자 한다. 버티게 해주는 것, 그 무엇에든 취해야 할 것이다.

장그래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정치적 계산을 하지 않고 지극히 일의 본질, 일의 ‘의미’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의 방식으로는 실제 현실에선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그 ‘본질’에 의미를 부여해준 이 드라마가,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드라마/웹툰을 둘러싼 폭발적 반응은 ‘현실에 기반한 공감’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징후적으로 읽힌다. 이 이야기는 ‘현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결코 ‘현실적인 드라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장그래의 입사 스토리를 포함해, 영업 3팀이라는 존재 자체 역시 달콤한 판타지다. 때문에 난 <미생>을 일종의 원형,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한다. <미생>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현실 그대로의 반영’이 아니다. 이 드라마가 그리는 일종의 판타지는 우리가 현실에서 열망하는 뭔가를 강하게 암시하며,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내 일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욕구, 동료와 공동체적인 팀을 꾸리고 싶은 욕망, ‘함께’ 일하는 기쁨…. 그것은 우리 사회, 노동, 공동체를 이해하며 구상하는 데 의미 있는 도움을 준다. 그렇기에 ‘텍스트로서의 의미’를 띤다. 그리고 그 바람과 열망이란, 가난한 집 딸과 부잣집 아들의 결혼이라는 신데렐라 동화 같은 허무맹랑한 판타지가 아니다. 우리가 직접 발 딛는 사회와 노동을, 이 드라마에 비춰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이야기로, 대신 ‘취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