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길다

밖은 끝없는 광활한 눈밭. 영원한 혹한의 겨울과 얼어붙은 불모의 땅. 그 시공간을 가로질러 달리는 철기 문명. 인류의 문명은 기차 안에 있다.

영화 <설국열차>는 인류 문명에 대한 알레고리다. 자연 그 자체는 가혹한 야만인 것. 거기서 인류는 문명을 만들고 야생의 혹독함으로부터 장벽을 치고 역사를 따라 질주해왔다.

그런데 그것은 기차다. 서로 분리된 칸들이 차례차례 이어진 구조이다. 맨 앞 엔진 칸에서부터 가장 끝의 꼬리 칸까지. 앞 칸의 지배자는 엔진을 다스림으로써 인류 사회와 역사를 이끌고 있다고 자부하며, 꼬리 칸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면서 생존하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와 메디슨 총리는 말한다. 기차에는 앞 칸과 뒤 칸이 있다고, 각자의 칸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인류 생태계를 유지하는 질서 그 자체라고, 그 밖을 뛰쳐나가면 죽음뿐이라고, 즉 불평등은 인류의 조건이라고.

옛 시대에 이것은 특별히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진리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사회는 거의 예외 없이 차별적인 신분제 사회였으니까. 사람들 사이에 권리와 의무, 삶의 기회와 조건이 평등하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역사책에 나오는 시절. 천부인권이 선언된 지 수 세기가 지났고, 세계인권선언 1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로 시작된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고 배우고 믿(어야 하)는 사회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알레고리이기는 하지만 역사영화는 아니다. 관객들은 공감한다. 우리 사회도 기차처럼 앞 칸에서 끝 칸까지 길게 늘어서 있다. 앞에서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넉넉한 공간을 차지하고 호화롭게 지내고 있지만, 꼬리 칸에는 떨어져 나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아귀다툼을 벌인다. 칸막이 문은 견고하고 거의 열리지 않는다. 분명 지금은 전근대의 시대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인데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의 시대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책이 한국에서나 전 세계에서나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1) 솔직히 두껍고 재미없는 책인데 이토록 많은 관심을 받는 이유는 딱 하나다. 이것은 설국열차의 구조가 현실이라는 것을 ‘경제학적으로’ 논증한 책이다. 앞 칸 극소수의 사람들이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꼬리 칸의 수많은 사람들은 앞 칸에서 던져주는 찌꺼기를 먹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우리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지만 내놓고 말하기 어려웠던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피케티가 보여주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양극화의 시기이다. 불평등이 자연의 질서라고 생각했던 전근대 시대 이후, 인류의 진보를 믿는 근대에 들어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고 한때 불평등은 완화되었다. 그런데 지금 왜 다시 불평등과 양극화의 시대로 돌아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친화적인가 아니면 배척하는가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 주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친화성을 보는 쪽은 자유를 강조한다. 민주주의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통해 발전한다. 또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한 경쟁을 통해 다시 사람들이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확대된다. 사실 생각해보면 민주주의 정치의 선거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시장 경쟁 아닌가. 정당과 후보자들이 각자 상품(정책)을 내놓고 소비자(유권자)가 선택함에 따라 정치라는 시장에서 승리하기도 하고 살아남기도 하고 또는 경쟁에서 패배하여 도산 기업처럼 퇴출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와 더불어 평등 또한 민주주의의 주요 가치다. 그리고 평등에 관한 한 자본주의는 이것을 잠식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는 적어도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조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빈곤하다면 자유도 무의미하다. 부유한 사람들에겐 수많은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빈곤한 사람들은 시장에 넘쳐나는 상품뿐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도, 하고 싶은 일도 선택할 수 없으며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포기해야 한다. 이런 점에 착목하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어울리기 쉽지 않다.

따라서 자본주의이자 민주주의인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불평등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교정하려는 노력이 존재해왔다. 누진세, 공공복지, 사회보장, 노동조합 등등. 순수한 자본주의의 원리 그 자체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민주주의적인 정치와 정책에 의해 정당화된 사회 제도들이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자유’가 득세하는 시기가 왔다.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의 경제적·정치적 원인과 과정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이름에서 표현되듯이 자유를 강조하는 정치경제적 경향이라고 해둬도 족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자유, 자본의 자유, 돈의 자유. 돈 많은 만큼 자유로운 자본주의에서 이때의 수혜자도 부유한 사람들이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자본주의이므로. 세금이나 복지처럼 평등을 위해 강제로 부富를 이전하는 대신 자유롭게 돈을 풀어놓는다면 돈은 돈에 몰리기 마련이다. 피케티의 책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된 이래 미국의 상위 1%가 20%의 부를 독점하고 있으며 상위 10%는 절반의 부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상위 10%가 차지하고 있는 부는 45%이다.2) “1%를 위한 99%”의 사회라고 한다.3)

그래, 좋다! 어차피 다른 세상 얘기, 퍼스트클래스에서 땅콩을 접시에 담아 먹든 봉지에서 꺼내 먹든 무슨 상관이냐?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성실히 일하고 가족과 함께 소소한 행복을 누릴 따름이지. 그거면 됐지. 그러나 문제는 ‘양극화’란 위가 더 상승하는 것뿐 아니라 아래가 더욱 전락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는 점이다.

    영화 <카트> ⓒ명필름

전락하는 노동자의 초상

영화 <카트>.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갑을 관계’라는 것이 있다. 계약서에서 돈을 내는 쪽은 갑, 돈을 받는 쪽은 을이라 지칭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돈을 받는 을은 돈을 주는 갑의 어떤 부당한 요구도 받아들이고 굽신거려야 하는 불평등함 때문에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단어처럼 유행하기도 한 말이다.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중의 을이다. 돈을 내는 손님과 돈을 받는 점원. 마트 직원들은 아침 출근 조회 시간마다 “고객 서비스!”를 구호로 외친다. 진상 손님 앞에서 무릎 꿇고 비는 영화의 한 장면은 아주 현실감 있게 얼마 전 한 비행기 안에서 재현되었다.

그리고 돈(임금)을 주는 기업과 돈을 받는 노동자의 관계. 어느 날 갑자기 해고통지서가 붙는다. 비정규직이니까 정확히는 계약 해지. 당장 아이 급식비가 없는 노동자의 처지가 고려되는 적은 없다. 오직 기업 사정, 기업 결정에 달린 일이다.

시장의 자유 확대는 노동시장에도 적용된다. 규제 없는 자유로운 계약. 원칙적으로 말하면 노동법이나 노동조합은 자유 계약 원리에 어긋난다. 고용이란 노동의 구매자(기업)와 판매자(노동자) 사이에 자유롭게 가격(임금 등 노동조건)을 정하는 계약일진대, 법으로 해고요건, 최저임금, 법정 근로시간 등등을 규정해 놓는 것은 국가 규제가 아닌가. 노동자들이 뭉쳐서 특정한 조건을 기업에 강요하는 노동조합이란 판매자 담합이 아닌가. 실제로 자본주의 초기에 계약 자유의 원칙을 신성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노동법과 노동조합에 반대했다. 단지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가 불평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등의 이름으로 노동법과 노동조합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다시 시장의 자유가 중시되고 노동시장 규제도 약화된다. 노동법이나 노동조합을 완전히 폐지하지는 못하더라도 대신 비정규직이 확대된다. 비정규직은 노동법의 규제를 받는 정규직보다 자유 계약 원칙에 따라 쉽게 계약 해지, 즉 해고할 수 있다. 정규직도 회사 사정에 따라 집단 해고할 수 있는 정리해고제가 도입된다. 이에 반대하는 것은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로 규탄된다.

<카트>에서 회사는 기업인수를 위해 직원들을 대거 해고하기로 결정한다. 처음에는 비정규직, 그 다음에 정규직. ‘그저 성실히 일하고 가족과 함께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뿐’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과정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이에 저항한다. 쉽지는 않다. 생계의 어려움, 관리자들의 협박과 회유, 회사의 손해배상청구소송, 경찰의 진압, 용역깡패들의 폭력, 동료들 간의 갈등과 배신.4) 인상 깊은 영화인가. 솔직히 내게는 진부했다. 노동사회학 연구자로서 실제 현실에서 무수히 직접 보고 들었던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카트> 자체가 2007년 홈에버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영화다.5) 다른 길은 있는가. 열심히 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미생>. 유명 웹툰이자 이번 겨울 드라마로 만들어져 크게 인기를 끌었다. <미생>의 노동자들은 <카트>의 노동자들에 비해서는 소위 잘 나가는 직장인들이다. 어쨌든 대기업 사무직이니. 정장을 입고 출근하며 창의력과 통찰력을 발휘하며 일한다(고 믿는다). 웬만한 사람들이면 부러워할 중산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항상 벌겋게 충혈 되어 있다. 인턴에서 계약직, 계약직에서 정규직, 다시 직급의 사다리. 한 번 낙오하면 끝이다. 열심히 회사에 헌신한다. 떨어져 나가면 살 길이 없으니까, 그리고 내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일이 결국 내 자존심이고 정체성이 되니까. 그럼에도 장그래는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오 차장은 퇴직한다.

양극화의 한 측면은 끊임없이 탈락자를 양산해내는 기제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카트>의 노동자가 해고당했을 때 전기요금을 낼 수 없어서 촛불 아래서 숙제를 하는 아들을 바라봐야 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낫다’고 가슴 쓸어내릴 중산층도 한 순간 삐끗하면 떨어져 버린다. 오 차장과 장그래는 오퍼상을 차렸지만, 흔히 말하듯이 ‘회사가 전쟁터면 밖은 지옥이다.’ 오퍼상이 실패하면 다음엔 소매상인가. 그러나 아마 그것도 <카트>의 ‘더 마트’ 같은 대기업에 짓눌릴 가능성이 높다.

춤추고 노래하라

이 원고의 청탁 주제는 ‘문화 예술을 통해 본 우리 사회의 불평등구조’였다. 불평등구조에 대해서 미흡하게나마 얘기했다. <설국열차>가 알레고리라면 <카트>와 <미생>은 지극한 리얼리즘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문화 예술 작품은 현실을 반영하고 그래서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질문을 거꾸로 던져보고 싶다. 신자유주의 시대, 양극화의 시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서 문화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빌리 엘리어트>와 <브래스드 오프>는 모두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과 좌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영국의 대처 총리는 시장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밀어붙였고, 특히 광부 파업의 실패는 신자유주의의 전면화와 노동자 패배의 상징처럼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여러 편 나왔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이들은 춤을 추고 연주를 한다. 빌리에게 발레는 고통스런 현실을 사라지게 하고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는 것이고, 그림린 노동자들에게 밴드 연주는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때 유일하게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였다. 그러나 춤도 음악도 단순한 도피는 아니리라. 문화와 예술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 돈의 자유가 아니라 평등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상상하게 해 주는 것이리라. 노래하고 춤추면 꽃이 피었다는 옛 이야기처럼 열차 밖의 설원에 꽃이 피게 하라.

          

           영화 <빌리 엘리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