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양함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
지난 2월 13일 러시아의 일간지 <브즈글랴트Vzglyad>시선이라는 뜻지는 ‘그들은 바랴크(Varyag)호를 인양하기 원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낯선 이름이겠지만, 바랴크호는 러일전쟁1에 참전했던 순양함이다. 당시로는 최신 기술로 건조되었던 바랴크호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 9일, 포함인 카레예츠(Koreetz)호와 더불어 인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물포해전에서 일본 함대의 공격을 받은 끝에 침몰했다. 이 배는 러시아인들에게 ‘적에게 항복하지 않는’ 러시아 해군의 투쟁정신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어 있다. 바랴크호가 일본 함대의 공격으로 치명적 손상을 입었을 때 지도부는 항복하여 배를 일본에 넘겨주기보다 차라리 배를 침몰시키는 쪽을 택했는데, 이를 러시아인들이 높이 산 것이다. 기억의 정치라는 면에서 자국 패배의 신호탄이 된 순양함을 영웅적 투쟁의 상징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이 절묘하다. 러일전쟁 발발 100주년 되는 해였던 2004년 2월 인천의 연안부두 해상공원에서는 제물포해전에 참가했던 러시아 해군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제막됐고, 새로 건조되어 바랴크호라 명명된 순양함이 행사를 위해 인천항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 기념비는 러시아인들에게는 자국의 패전과 군사적 용맹성에 대한 기억을, 한국인들에게는 제국주의 침략사의 한 단면과 당시의 치욕적인 한국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인천 앞바다에 가라앉았던 바랴크호는 얼마 후 일본군에 인양되어 러시아 측에 매각되었으며, 영국에서 수리를 받다가 러시아혁명2 후 독일에 매각되었는데, 1925년 영국에서 독일을 향해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스코틀랜드 앞바다에서 다시 침몰하였다. 일간지 보도에 의하면, 이처럼 두번째 침몰한 채 80년 이상 가라앉아 있는 이 배를 인양해야 한다는 청원서가 러시아 정부에 제출되었다고 한다. 실현 여부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바랴크는 러시아어로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가 해당 출신 바이킹을 가리킨다. 그들이 9세기에 동슬라브인슬라브족의 한 갈래. 동유럽 평야에서부터 우랄에 이르는 지역에 살면서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등을 씀들의 땅에 와서 국가를 형성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고 연대기는 기록하고 있다. 한때 대서양과 지중해 일대를 휩쓴 탁월한 뱃사람, 바다 위 무적의 전사였던 이들의 명칭을 따서 러시아제국 최신 순양함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한 서유럽적 기원의 이름을 가진 바랴크호가 한국의 서해안에서 아시아의 신흥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의 해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은 어쨌거나 상징적이기는 했다. 게다가 이 배와 함께 자폭을 택했던 배 이름 ‘카레예츠’는 한국인을 뜻한다.
그렇다면 바랴크호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아시아를 향해 밀려왔다가 다시 서양을 향해 멀리 대서양까지 밀려갔으며, 그곳에서 최종적으로 침몰했음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까? 그러기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역할을 너무 띄우는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어 마뜩지 않다. 어떻든 인천은 바랴크가 상징하는, 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제국의 관심과 그 좌절의 역사에서 한 지리적 결절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자기 속의 타자: 러시아 속의 아시아
러시아는 알고 보면 역사적 상처가 많은 나라이다. 러시아인들이 생각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는 아시아에서 받았다. 그 하나는 몽골 군대의 침입과 몽골제국의 지배3로 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여 받은 것이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 대군4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군대5도 모두 물리친 러시아이다. 그래서 러시아 땅은 외국 군대의 무덤이 되곤 했지만 이 나라는 유독 아시아 나라들에 패배를 거듭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에 대해 두려움과 반감을 가졌던 것일까?
러시아인들은 러시아가 유럽에 속하는지 아닌지,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논쟁해 왔지만, 그들에게 아시아는 오랫동안 ‘절대타자’였다. 유럽인들은 러시아가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이유로 이 나라는 아시아적 사회라고 생각했고, “러시아인을 한 꺼풀 벗기면 타타르인 몽골계와 투르크계 주민의 혈통이 섞인 아시아계 민족이 나온다”는 속담으로 이를 표현했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아시아를 후진적, 야만적 사회라 여기며 그들 나름의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했다. 그리고 자기 사회가 겪는 어려움을 600년도 더 전에 겪은 몽골제국 지배의 탓으로 돌리는 습관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러시아인들은 몽골 지배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러시아는 몽골제국의 분열과 몰락 후 그 유민들을 제압하고 국경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계속 동쪽으로 나아갔고, 이것을 우리는 시베리아의 정복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중국,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과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상황이 심화되면서 러시아인들의 관심을 아시아로 향하게 하는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시베리아의 아시아계 주민들이나 티베트 주민들은 러시아 황제를 ‘백(白)황제’라고 불렀는데, 이는 러시아 황제에 대해 일부 동아시아인들 사이에 퍼졌던 환상과 일종의 정치적 기대를 담은 말이었다. 특히 이들 지역의 일부 인물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백색 짜르(tsar)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가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담론을 유포하면서 러시아제국의 정치지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시베리아 출신 부랴트(Buryat)동시베리아 남부 바이칼(Baikal)호 동남쪽에 위치 사람인 도르지예프(Agvan Dorzhiev, 1853~1938)는 러시아의 짜르인 백색 짜르는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백색 타라(Tara, 구원자이며 자비의 보살)의 화신이고, 극락인 ‘샴발라’6는 러시아에 위치한다고 말하면서 러시아 황제가 대(大)불교국을 수립하여 그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부랴트족 출신인 바드마예프(Pyotr Badmaev, 1851~1920)는 동아시아와 러시아의 관계재편 문제에 관한 주장을 담은 ‘바드마예프 구상’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와 간쑤(甘肅)성 성도(省都)인 란저우(蘭州)까지 연결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는데, 이는 만주왕조에 대항하는 티베트인, 몽고인, 한족(漢族) 등으로 하여금 정치적 봉기를 일으킨 후 백황제에 보호를 요청하여 자발적으로 러시아에 복속케 하려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특이한 제안은 러시아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그 자체로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러시아제국은 결국 이 지역들을 넘어 만주, 조선,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한편 19세기 말, 20세기 초 많은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시베리아에 정주하자 러시아의 일부 논자들은 이른바 황화론(黃禍論)황인종이 유럽 문명에 대하여 위협을 준다고 규정, 황인종을 세계무대에서 몰아낼 것을 주장을 들고 나와 아시아계 주민들의 증가에 경고를 발하기도 하였다.

한국 - 러시아 - 동북아시아
그렇듯 러시아는 자국의 아시아화를 두려워하면서도 아시아에 끌리는 거역할 수 없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러시아의 일부 논자들은 아시아가 러시아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강하게 부각시켜 “유라시아 사회로서의 러시아”론을 폈다. 또한 고르바초프(Mikhail Sergeevich Gorbachev)전 소련공산당 서기장는 1988년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에서 “러시아는 아시아 국가의 일원”이라 선언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 적극적으로 경제협력을 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는 아시아에서의 탈냉전 선언이었으며 한러 수교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이처럼 러시아와 아시아는 서로 깊숙이 침투해 있다. 최근 동(북)아시아 사회의 연대 강화라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동(북)아시아 논의는 반드시 러시아를 일원으로 포함해야 한다. 우선 러시아 속의 아시아인 우랄산맥 동쪽 지역(통칭 시베리아)은 면적 자체만 해도 유럽지역 러시아의 세 배다. 게다가 시베리아에는 러시아 전체 석유 보존량의 80%, 천연가스의 85%, 석탄의 80%, 비슷한 비율의 귀금속과 다이아몬드가 각각 매장되어 있다. 한국이 시베리아 자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러시아를 한국을 위한 자원제공자로만 여기고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최소한 경제 교류를 위해서라도 상대 사회의 역사·문화적 전통의 이해는 불가결하다. 이는 상대사회의 구성원들도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상기하는 것과 관련한다.
현실적으로 러시아는 옛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 북한에 대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나라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도 방코델타아시아은행(Banco Delta Asia)1935년 설립된 마카오의 은행에 묶여있던 북한 자금을 자국은행을 통해 북한으로 송금하도록 허용하였다. 러시아는 한반도 주변 강국들 중에서도 한반도 평화통일을 적극적으로 환영할 나라이다. 한반도 분단을 통해 얻을 이익은 없는 반면, 안정된 통일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이익은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한국이 미국 일방주의의 파장에서 벗어나 동북아연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인들은 러시아 속 아시아를 대표하는 시베리아가 한국인들에게 지니는 특별한 역사적, 정신사적 의미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인들에게 시베리아는 중국이 아닌 대륙북방으로서 역사적 상상력을 위한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시베리아는 한국의 역사가 중국정향적(china-oriented)인 것으로만 치닫는 것을 제어해 준다. 한국이 중국과의 역사논쟁에 대처하는 데 협력자가 되어줄 세력도 역시 러시아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는 발해(渤海, 699~926)의 역사를 자국의 것으로 독점하려는 중국의 시도를 거부한다. 중국 중심이 아닌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형성을 위해서는 시베리아를 포함하는 러시아를 역사적·현실적 사유의 중요한 일부로 끌어들여야 한다.
아울러 이른바 세계화 시대 시베리아를 사유하는 사람들은 시베리아 토착민과 시베리아 자연보호를 위해 함께 협력할 필요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시베리아는 단순한 경제 개발, 이용의 대상만은 아니다. 기후변화에서 시베리아가 담당해야 할 역할까지 생각한다면, 시베리아는 국제정치적·경제적 고찰대상이란 의미를 훨씬 벗어나, 동아시아 지역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맺기 방식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공간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미지 제공_ 도서출판 작가들, 『러일전쟁, 제물포의 영웅들』

주)
1 1904년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묵인받고, 랴오동(遼東)반도를 차지하여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2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3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아울러 이르는 말. 로마노프왕조(Romanov, 1613~1917)가 무너지고 볼셰비키에 의한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다.
3 몽골제국의 2대 황제 오고타이(窩濶台, 재위 1229~ 1241)가 1235~1242년 러시아 및 유럽 각지의 토벌을 명하여, 1243년 킵차크한국이 남러시아에 세워졌다.
4 1812년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에 경제적 타격을 주기 위하여 유럽 대륙과 영국의 무역을 금지한 명령)을 어긴 러시아를 침공하였으나, 패하였다.
5 영국 침공에 실패한 히틀러는 1941년 러시아를 침공하나 패하였고, 이 침공은 히틀러의 멸망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6 ‘감추어진 왕국’이라는 뜻으로, 1933년 제임스 힐튼(J. Hilton, 1900~1954)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샹그리라(Sangri-La)라는 마을이 샴발라로 그려졌다.

韓貞淑 1957년 경북 점촌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 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주체들』, 「하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들 : 1860년대 러시아의 세대갈등과 세대내 갈등」 등.
clioha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