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광_ 고초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_  물론이죠. 그런데 아버지 말씀이, 나라 생각은 조금도 할 수가 없었데요. 길에서 맹인들을 만나면 침 뱉고 소금 뿌리고 물바가지 끼얹는 세상에서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아이들(맹아들)이 크는걸 보고 너무 놀라셨나 봐요. 나라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그저 이 아이들 다 거지되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만 하셨답니다. 당시 맹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침을 놓거나 사주팔자 봐주는 것밖에 없었어요. 안마는 일본사람을 상대로 한 거였지, 조선사람은 낼 돈이 없었지요. 그래서 잡혀가면 시종일관 이 말만 하셨대요. “아이들 깡통 차고 다니면 볼썽사납기도 하지만 정치가들도 괴로워진다. 그래서 난 이 아이들 굶지 않도록 하는 연구만 지금 하는 거다. 날 잡아다 죽이면 할 수 없지만.” 그렇게 버티셨어요.

허은광_  그러시다가 영화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가셨지요?

박정희_ _ 제가 사범학교 1학년일 때인데 아버지가 제생원에서 권고사직을 당했거든요? 정동교회에서 박두성이란 사람이 있는데 백수라더라. 이럴 수가 있는가, 영화학교 교장이 공석이라는데 거기에 발령을 냅시다.재직 1936~1940년 정동교회에서 마련해준 내리교회 옆 게딱지같은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잘 수가 없어요. 밤마다 쾅쾅쾅, 타이프라이터 찍는 소리 때문이었죠. 아버지가 맹인교육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겁니다. 여자기숙사가 얼마나 고요합니까? 그래서 “아버지, 죄송하지만 타이프라이터 그만하오.” 그랬더니 노동이 부족해서 잠이 안 오신데요. 그런 무서운 분이셨죠. 무엇을 그렇게 타이핑하는가 하니, 박계주(朴啓周, 1913~1966)의 『순애보(殉愛譜)』(1938),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사랑』, 『흙』, 박종화(朴鐘和, 1901~1981)의 『금삼(錦衫)의 피』, 고전소설 『홍길동전』 같은 작품들을 다 써서 앞 못 보는 사람들한테 보내주고 받고 그랬던가 봐요.

        허은광_ 그런 자료들은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박정희_ _한국점자도서관에 다 있어요. 오라버니들이 버리려고 한 걸 제가 다 받아왔던 거죠.

허은광_ 송암이라는 호를 독립운동가이신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 선생께서 지어주셨다지요?송암은 이동휘가 세운 강화도 보창학교(普昌學校) 출신

박정희_  그건 돌아가신 뒤에 알게 됐죠. 전 아버님한테 호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언젠지는 잊어버렸는데 박병재(朴秉宰)라는 사람이 어느 날 절 찾아왔어요. 성균관대 국문과 2학년에 군대를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약을 잘못 써서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해요. 대학도 군대도 중퇴하고 자살해버릴까, 하다가 송암 선생 업적을 듣고 감동해서 논픽션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답니다. 그래서 50만원 고료의 제1회 <신동아> 논픽션공모 60만원 고료 제6회 <신동아> 논픽션 공모(1970)의 착오에 응모할 요량으로 부산에서 인천까지 절 찾아왔던 거죠. 제가 틈틈이 쓴 회고기록이나 호적등본 같은 자료를 보내줘서 글을 쓰게 했지요. 그랬는데 나중에 보내온 원고를 읽어보니까 송암 선생을 야망에 불타는 청년으로 그려놓았던 겁니다. 제가 편지로 호되게 야단을 쳐서 공모에 내지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에 답장이 왔어요. 즉각 다시 쓰기로 결심해 삭발을 하고 술 담배 다 끊고 기숙사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한두 달 있다 새 원고가 왔는데 썩 괜찮았습니다. 내려면 내시오, 했는데 그게 당선이 되었지요.「훈맹정음(訓盲正音) 창안자 박두성傳」(1970) 숭의교회 이홍은 목사와 관련된 무슨 출판사에서 박병재 씨한테 제가 보낸 편지들을 묶어서 책을 내겠다고 했는데 그 며칠 뒤 화재로 다 타버렸지요. 이동휘 선생이 송암이라는 호를 아버님께 지어준 사실은 박병재씨가 그때 밝힌 것입니다. 국권을 빼앗긴 직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 총독 암살미수 사건(1910)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동휘 선생이 만주로 망명을 떠나면서 우리 아버지한테 동행을 청했어요. 그때는 젊은 애국자들이 중국으로 만주로 망명을 가곤 했지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9남매의 맏아들에 아이 넷 딸린 가장이라 그러지 못했죠. 이동휘 선생이 떠나시면서 소나무 같이 절개를 잃지 말라는 뜻으로 ‘송암’이란 호를 지어주신 모양이에요. 아버지는 망명하는 것만이 애국이라고 생각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더러도 그러셨어요. 사범학교에 입학해서 일본말도 옳게 배우고 저들의 국민성을 아주 샅샅이 알아봐라. 이렇게 좋은 기회는 없느니라. 지금은 우리가 지배를 당하지만, 우리도 한글처럼 우수한 문화를 가졌다. 일본이 대동아(大東亞)를 다 먹어치우지는 못한다.

 

허은광_ 점자를 만드신 것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박정희_  식구들과 함께 이 땅에 남은 것은 맏아들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지요. 우리 아버지가 점자로 성경을 찍으라고 할 때 우리 막내딸이 젖먹이였거든요? 시부모님도 살아계셨고 도저히 성경을 아연판에 찍을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송암 선생 말씀이 “사회가 너를 한 남자의 노예로 살라고 교육했더냐?” 그때 진짜 혼났어요.

허은광_ 일제 때 대문에 태극을 그려놓으신 사연도 재밌던데요.

박정희_  일제 때가 아니라 해방 후의 일이에요. 저는 1944년에 평양으로 시집을 갔다가 1948년에 인천으로 내려왔어요. 집에 오니까 대문에 페인트로 하나 가득 태극을 그려놓으셨던 겁니다. 그래서 이유를 여쭈니까, “눈감은 아이들이 찾아오는데, 율목동(栗木洞)인천 중구 소재 25번지 박선생네 하면 누가 알겠니? 태극대문집이 어디요, 하면 영락없이 가르쳐주거든? 그래서 그렸어” 하시더라고요. 그 뒤로 우리 아이 클 때까지 태극대문집에 살았지요.

허은광_ 선생께선 인천에 내려와 사시면서 여기 배다리 서점가도 자주 다니셨다지요?

박정희_  한국전쟁 때 살기가 어려워져 제가 고구마장사를 했어요. 돈이 조금 생기면 아버님이 책 사러 가자셨어요. 우린 광에다 큰 독을 두셋쯤 묻고서 거기에 책을 숨겨뒀죠. 여차 하면 피난가야 하니까. 그런데도 아버지는 책 욕심이 아주 많았습니다.

허은광_  기왕 한국전쟁 얘기가 나왔으니까 분단상황이 의식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북에서도 점자는 박두성 선생이 만든 것을 쓴다지요?

박정희_  그렇지요. 제가 시집갈 무렵 아버님께서 평양에 있는 맹인제자 고익화에게 점자로 편지를 보냈어요. 아무개하고 우리 정희하고 혼인 얘기가 있는데 뒷조사를 해보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고익화 장로가 조사해서 점자로 답장을 했어요. 송암 선생은 자기 제자들을 제일 사랑하고 믿었지요. 이것만 봐도 이북에서 같은 점자를 쓴다는 게 증명됩니다.

좌)1928년 송암과 부인.5자녀와 식모 찬구씨. 가족사진 우)박두성 회갑, 부인55세 자택마루에서  

허은광_  생전에는 선생의 존재를 일반인들이 잘 몰랐지요?

박정희_  예나 지금이나 맹인사업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돌아가시니까 대통령이 조의금을 보내셨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은 선생의 동상을 세우겠다고 제자들이 찾아오니까, 오히려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호통을 치셨어요. 그걸 제가 들었죠.

허은광_  올해 인천문화재단에서 인천문화예술 대표인물 조명사업으로 송암 박두성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전시 및 학술심포지엄 등 관련 행사들이 열리는데,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한글점자표    

박정희_  이런 일은 자꾸 해야 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깨닫지요. 여러분들이 정성을 다해서 맡으신 일 열심을 다해주길 바랍니다.

허은광_ 어깨가 무겁습니다. 긴 시간 애쓰셨습니다.

정리_ 姜敬錫 인천문화재단 전문위원

이미지 제공_ 朴貞嬉

朴貞嬉 1923년 서울생. 송암의 차녀, 수채화가. 경성여자사범학교 졸업. 인천제2공립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 인천화도유치원장 20년간 역임. 내과의사 유영호(劉永鎬, 2005년 작고)와 1944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4녀. 1997년 ‘장애인의 날’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 현재 남편이 운영하던 평안의원(平安醫院, 개원 1949년) 자리에 ‘평안수채화의집’을 열고 수채화 교실 운영. 저서로 『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 2005)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