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전화

서상집(徐相潗, 1854~1912)은 개항기 인천의 상업과 금융, 그리고 무역 분야에서 중요한 활동을 한 대표적 상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병의(徐丙義, 1893~1945)를 비롯한 그의 자녀들이 인천문화사의 전설처럼 거론되고 있음에도 정작 그의 생애나 가족사에 관한 기초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물론 오성 교수의 「19세기말 인천항의 호와 호주」(1998)에서는 생애의 일단이 밝혀졌고, 이영호 교수의 「인천개항장을 중핵으로 한 서상집의 경제활동」(2007)은 서상집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기존의 연구를 종합하면서, 서상집의 활동에서 “한국적 매판(買辦)의 가능성을 지닌 동아시아 개항장 자본가”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서상집 연구가 본격화할수록 공백도 선명해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의 청년시절, 왕실과 개화파를 넘나든 인간관계, 부를 축적한 결정적인 계기 등은 상당부분 추리에 기대고 있다. 그의 사망시기와 같은 기본정보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 가족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부호의 외아들인 서병의는 왜 가족을 이끌고 중국을 전전하다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사를 겪어야 했을까? 서상집 자녀들의 복장이나 행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감안한다면 이 같은 의문이 호사취미의 발로라고 간주할 수만은 없을 터이다. 서상집의 행적과 활동이 근대초기 인천항의 경제활동을 이해하는 첩경이라면, 그와 그의 가족이 보여준 일상은 일가의 사생활이 아니라 문화접경지대에서 근대를 온몸에 체현해보인 일종의 ‘문화 표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상집의 생애와 관련된 기초적 자료가 부족했던 것은 서병의가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해 해방 직후 몰살당했던 비극과도 관련된다. 그런데 서상집 연구의 단초가 될 중요한 자료가 실로 우연한 기회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2007년 가을, 미국에 거주하던 서상집의 손자 서정문(徐廷文, James Soh)씨가 인천학연구원으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는 우연히 <경인일보>에서 연재하던 「인천인물 100인」 시리즈의 ‘서상집 편’을 인터넷을 통해 읽었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조부의 행적이 인천의 언론에 보도되고 학술적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노라고 했다. 며칠 후 서정문씨는 인천학연구원을 방문하여 서상집과 동생 서상윤의 사진, 서상집의 제적등본 사본을 연구자료로 제공하였다. 서정문씨는 올 7월 사업차 한국 방문 길에 서상집 가문의 생몰연도를 말끔하게 정리한 가계도도 건네주고 돌아갔다. 이미 은발이 된 서상집의 손자 서정문씨를 배웅하면서 필자는 한 상인의 파란만장한 삶과 연관된 사건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와 겹쳐지는 개항장 인천과 식민지 한국의 변화를 떠올려 보았다.

두 장의 사진

서정문씨는 필자가 <경인일보>와의 서상집 관련 인터뷰에서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서상집의 생애사 자료가 빈곤하다고 탄식한 것을 의식한 듯 먼저 서상집과 동생 서상윤의 빛바랜 사진을 보여주었다. 누렇게 바랜 서상집의 사진 한쪽 귀퉁이는 크게 찢겨나가 있었다. 그래도 100년 이상을 견뎌온 사진치고는 보존상태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사진 속의 서상집은 테가 좁은 갓에 두루마기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여송연을 든 왼팔을 테이블에 기댄 채, 차분한 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테이블은 긴 수술과 꽃무늬 장식의 두꺼운 천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엔 두 어 권의 양서(洋書)가 놓여 있었다. 그는 작은 체구에 오뚝 선 콧날, 계란처럼 갸름한 얼굴형이어서 개항장의 상권을 장악하고 중국과 세계를 무대로 무역업을 펼친 대상(大商)의 풍모라기보다는 갓 쓴 청년 같은 분위기였다. 다만 또렷한 눈동자와 두툼한 입술, 체구에 비해 커 보이는 손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서정문씨가 꺼낸 또 한 장의 사진은 서상집의 동생인 서상윤의 것이었다. 이 사진을 보면 이들의 서구취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양복차림에 캡을 쓴 서상윤의 모습은 완연한 서양귀족 자제의 모습이다. 그가 1873년 태생임을 감안하면 사진은 1900년 이전에 촬영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1900년 이전에 서양식 복장문화를 파격적으로 수용한 사례는 찾기 힘들 것이다. 서상집의 사진을 통해 개항기 상인의 복장을 가늠해볼 수 있다면, 서상윤의 사진은 서양식 복장문화를 수용한 특수한 사례일 것이다.

서상집과 그의 후손들

서상집의 제적등본이 중구청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를 규장각에 보관된 인천 외리(外里) 호적과 대조하면 서상집의 생몰연대를 확정할 수 있다. 그는 1854년(開國463年) 부(父) 서씨 언순과 모(母) 경주 최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59세 되던 해인 1912년(大正元年)에 사망하였다. 개항장의 부호였던 서상집은 그해 초에 사망한 본처 김씨와 함께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에 있는 선산에 묻혀있다고 한다. 사진으로 본 서상집의 묘는 기대와 달리 묘석도 상석도 없는 평범한 무덤이었다.

서상집은 본처 김해 김씨 외에 강씨(康氏)를 비롯한 또 다른 소실은 두었던 모양이다. 제적등본에 의하면 장남 병의(丙義)는 1893년 김씨 부인 소생이며, 세 딸 진주(眞珠), 금주(金珠), 은주(銀珠)와 초년에 병사한 차남 병위(丙威)는 소실 강씨 소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고일(高逸, 1903~1975) 같은 향토 언론인은 장남 병의가 “전형적인 ‘존불(John Bull)’로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에 유학하고 돌아온 ‘모던보이’로 알려졌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고일, 『인천석금』 참조 서병의는 전형적인 영국신사로 이국적 풍모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오랫동안 외국유학을 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축구 심판 선구자‘로 서병의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899년 상하이의 서양인소학교 토마스핸버러에, 1903년에는 영국 앨리브리칼리지를 졸업하고, 1908년에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대학 의과에 입학하였다가 옥스포드대학으로 전학하여 문과를 졸업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서병의가 귀국한 것은 1913년으로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 되던 해이며 서상집이 사망한 이듬해였다. <동아일보>(1930년 4월 3일) 유년기에 유학을 떠났다 성년이 되어 되돌아온 서병의는 한국말을 ‘가갸거겨’부터 새로 배우는 한편 ‘신축구단체’인 휘문구락부를 결성하는 등 축구보급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고 한다. 최성연 시인이 전하는 서병의와 형제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서상집은―인용자) 어찌되었거나 부호인지라, 그의 자녀는 언제나 뉴우·스타일의 양복을 쪽쪽 빼고 다녔으며, 신기한 소지품이 많었고 또 멋진 오오트바이를 몰고 으시대는 “모오던·뽀이”이었던 까닭에 그 시절 청년들의 선망을 온통 받었다. 축구를 하러, 웃터굴로 나올 적이면 일반 청년들은 겨우 미투리에 감발을 하였건마는 그들 형제는 가죽 축구화도 부족해서, 정갱이까지 가죽 용구로 감싸고 나오는 통에 모두 기가 죽었다고 한다.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이 회고에 ‘그들 형제’라고 한 것은 서상집의 아들 병의와 동생 서상윤의 외아들 병일(丙日)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병일은 서상집의 차남으로, 자녀가 없던 동생 서상윤의 양자로 보내졌다고 한다. 서상집의 사진을 들고 미국에서 인천으로 찾아온 서정문씨는 서상집의 차남인 서병일의 막내 아들로 영상학원을 경영하고 있다. 서병일은 서상집과 또 다른 소실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장남 서병의와는 이복형제가 된다. 서병의 가족이 중국에서 몰살당해 대가 끊어졌지만 서병일의 11남매들, 그러니까 서상집의 손자들은 대부분 195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가 “그만그만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형제들 가운데 서정권(John Soh)씨는 저명한 영상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의문에 찬 비극적 가족사

서상집의 장남 서병의와 그 가족의 죽음은 의문으로 가득하다. 서병의는 유년기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상하이 등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1913년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축구보급운동을 펼친 일 외에는 특별한 활동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직업도 없이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평생 축적해놓은 막대한 재산 때문일 것이다. 인천으로 돌아온 서병의는 임복순과 결혼하여 모두 5남매를 낳았다. 서병의가 막내딸(정민)만 남겨두고 솔가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1940년경이라고 한다. 이들 가족은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10월 15일, 중국 톈진(天津)에서 모두 살해되는 참사를 당한다. 지금까지 서병의의 죽음에 관한 것은 최성연이 그의 『개항과 양관역정』에서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호화롭게 살던 귀공자들이었고, 또 외국유학을 갔다 온 재사(才士)들이었으나, 인천서는 그들을 받어 줄만한 직장이 없었던 탓인지 서병의씨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해며 천진(天津)서 살었다는데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혐의를 받고 우리 독립군의 손에 일가 몰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호강스럽게 자란 사람들의 최후라고 반드시 “햅피이·엔드”로 막을 내린다는 법은 없는가 보다.

서병의 가족의 죽음에 관련해서 서정문씨의 누나인 서정애(1927년생, 미국거주)는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해방되던 해 독립군을 자처하는 괴한이 톈진의 집에 들어와  2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서병의는 권총으로, 다른 가족은 칼로 살해했으며, 시신은 임복순의 동생인 임수홍이 톈진으로 건너가 수습했다”고 당시에 들었던 사건의 전모를 회고했다. 그리고 서병의가 막내딸 정민을 인천에 남겨둔 것은 정민이 일본인 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거라고 한다. 정민은 이후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확인했으나 다시 연락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서병의 가족을 독립군이 친일행위를 이유로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다. 해방이후 혼란한 와중이라고는 하나 친일파가 아니라 국내의 악질적 일본인들도 대부분 무사히 일본으로 되돌아갔던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찢겨진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서상집의 생애와 일가의 운명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전환국(典?局)고종 20년(1883)년에 설치된 조폐기관 기수(技手)에서 중국과 일본, 유럽의 상업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개항장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그의 활동상을 입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방면의 연구자들이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한국 근대상업사의 태동기에 걸쳐 있으며, 그의 행동반경은 인천을 넘어 경강(京江)지역, 중국 상하이와 톈진을 넘나들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미지 제공_ 필자

金昌洙 1958년 안동생. 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최근 글로 「아우라 없는 장소의 운명」, 「월미도에서 보는 한국의 누정문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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