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도시, 싱글, 소비만큼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여기에 쇼핑과 명품, 사랑과 섹스를 덧붙이면 그림이 좀 나온다.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2008), 『쇼퍼홀릭Shopaholic』(2005),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2006)로 장르 불문하고 이어지던 뉴욕 발(發) 칙릿 젊은 여성(chick)과 문학(literature)의 합성어 열풍이 꺾이나 싶더니 한국형 칙릿들이 각광받고 있다. 『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 2006), 『스타일』(백영옥, 2008), 『걸프렌즈』(이홍, 2007), 『압구정 다이어리』(정수현, 2008) 등이 그것이다.

칙릿은 큰언니 격인 <섹스앤더시티>가 TV시리즈 종영 4년 만에 영화로 개봉되고, 베스트셀러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가 드라마화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캐리 <섹스앤더시티>의 여주인공의 ‘구두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줬던 브랜드 마놀로블라닉은 개봉 시기에 맞춰 발빠르게 신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이 주인공들은 무엇보다 욕망에 충실하다. 열심히 일해서 갖고 싶은 것을 ‘지르는’ 자본주의사회의 총아들답다. 밥보다 비싼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는 이유로 사회적 지탄을 받던 된장녀 논란1과 노골화한 ‘부자되세요’ 욕망이 그녀들의 소비를 능력으로 포장해줬다.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들이 각광받는 시대, 새 구두를 ‘내 새끼’라고 거침 없이 외치는 신상녀새로 나온 물건과 상품만을 선호하거나 좋아하는 여성 서인영이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주인공은 “널 사랑해, 하지만 나를 더 사랑해”라며 남자와의 이별을 선택하고, 동성 친구들과의 끈끈한 우정을 위해 건배한다. <섹스앤더시티>의 캐리에게 말 통하는 쿨한 게이 친구가 있었다면 한국의 오은수『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에겐 원나잇스탠드를 거쳐 사귀게 된 7세 연하남 태오가 있다. “지금 이 나이에 내가 너를 만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고 따져물어야 하는 현실적이고 남루한 고민도 함께.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인 『스타일』의 주인공이 잡지사 편집자인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크리스찬 디올을 소재로 쇼핑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말라비틀어지지 않으면” 비난받는 패션 피플2 사이에서 웰빙 기사를 쓰며 컵라면을 먹는 이중생활은 제아무리 화려한 화보를 제작한다한들 직장인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숙명이다. 스키니진 체험기를 쓰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약과다. 프라다를 원하는 속물적 욕망과 굶고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고 싶은 욕망의 공존 속에서 소설은 스타일리쉬하게 전개된다. 감당할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강남 좌파3란 비아냥거림을 들으면서도 이들의 이중적(?) 행동은 계속된다. 청담동과 가로수길 등 현재 한국의 가장 ‘핫’한 스페이스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일과 사랑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잡지 속 화보만큼이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흡인력 있는 문장에 이끌려 책을 읽고 나면, 소설이 아니라 패션 잡지를 뒤적이다 놓은 기분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이제 이런 소설이 나올 때도 됐지’ 하면서도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2008년 한국이라 통칭되는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결코 낯익거나 동질감을 느낄 수도 없다.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88만원 세대에게 이 패션 피플들은 어떤 느낌일까.

섹스, 동거, 일, 우정, 명품, 게이, 결혼이 뒤섞인 한국형 칙릿의 범람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기다림의 미학 대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을 표방하며 살아가지만, 사실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개인들의 분투를 가장 화려한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홀로 떠 있는 섬이나 마찬가지인 개인들의 허한 속을 잠시나마 위로하는 차원이다. 그래서 “여성, 소비, 도시를 서로 다른 그림으로 조합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환기시키지 않더라도, 칙릿이 새로운 장르로서 생명력을 얻기엔 부족해 보인다.

“『스타일』을 읽으면 유행의 거리를 멋지게 차려입고 걷는 느낌”이라는 한 독자의 말처럼 간지 感じ, 느낌나는 비쥬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다. 탁 트인 창가에 앉아 맥북(Macbook) 애플 컴퓨터에서 만든 매킨토시노트북을 펴놓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이어폰을 꽂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너도 나도 외롭다고 외치고 있는 사회. ‘책 읽는 스타벅스’에 가야 독서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이중성의 시대,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따지는 속도 강박증의 사회에서 칙릿의 주인공들은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얼마나? 내가 열심히 일해 버는 돈의 무게만큼!

주)

1      논쟁 초기에는 ‘명품에만 빠져 사는 허영심 가득 찬 여성’으로 국한되었지만, 점차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려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악용해 남성들에게 과도하게 의지하는 지각없는 여성을 지칭. 스타벅스의 본격적인 국내 진출과 맞물리면서 사회적 논란거리가 됨.

2      디자이너와 모델 외에 패션 에디터와 스타일리스트, 패션 PR, 바이어, 헤어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패션 사진작가 등 패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총칭.

3      고학력ㆍ고소득의 진보적 인물, 생각은 좌파적인데 생활수준은 강남사람에 못지않은 계층을 통칭.

鄭知恩 1981년 인천생. 인천문화재단 전문위원. 최근 글로 「비신화화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등. solbitur@if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