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적인 혜화동 마로니에공원과는 대조적으로 공원 안의 아르코미술관 입구는 다소 폐쇄적이다. 견고한 벽돌건물 지하에 전시장이 있기 때문인데, 이번 전시에서는 그 폐쇄성을 한층 강조해 미술관 진입로에 나무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 엄폐물은 미술관 문턱에 대한 재치 있는 풍자이자 이 전시에 합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적 즐거움에 대한 호기심 유발 기제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의 아르코미술관 전시는 기획전 위주였다. 따라서 기존 소장품들은 수장고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수장고의 작품들이 30년간의 먼지를 벗고 전시장이라는 해석의 열린 장으로 호명되어 나왔다. 지하 전시실로 들어가면 먼저 만화가 김영기의 〈인트로intro展〉를 ‘통과’해야 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다음 전시에 이르는 통로가 전시장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환경과 역사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 〈인트로展〉의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상큼한 애피타이저로 다가간다. 〈산·나무·풀·집 그리고 골목展〉(작가 김보민)의 미로와 같은 공간구조는 산수화 전통에서 넓게는 공공미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시공간 읽기의 역사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지하전시실 마지막에는 〈그릇의 몸과 욕망展〉(작가 강홍구)이 있었다. 도예작품을 무대조명으로 강하게 비추고 그 그림자를 얇은 막에 투사하는 방식이었다. 소장품에 엉킨 다양한 욕망을 시공간적인 시로 풀어낸 이 전시는 어떤 오브제(objet)라도 미학적으로 읽어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자 번쩍번쩍한 은박 재질의 벽에 서예액자가 서 있었다. 김학량의 〈글씨의 기억展〉이다. 초록색 펠트(felt) 벽이었다면 이만한 충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벽에 붙은 작품(혹은 자료)들은 더욱 파격이다. 음식점의 액자글씨에서 가훈 대필 사이트의 출력물, 게다가 원로작가 전시에 온 화환 리본의 축하메시지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기획자는 A4지에 프린트하고 핀으로 콕 꽂아 글씨에 대한 우리 시대 특유의 의미망을 읽어낸 것이다. 어떤 이미지라도 의미의 다양한 층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삶을 반추하는 거울일 수 있다는 점을 강홍구에 이어 보여주는 해학적인 전시였다.

김보민의<산나무풀집 그리고 골목展>    

다음 전시도 흥미로웠다. 〈테이크인take in展〉은 작가 김영기의 아르코 조각소장품에 대한 영상작업 전시였다. 기획자는 관객이 수장고의 소장품 전부를 볼 수 없다는 점, 특히 조각의 경우 물리적으로 산재해 있는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전시는 여러 곳에 설치된 조각 작품을 촬영해 순간적으로 팡팡 영사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소장의 의미와 소장품 활용의 문제를 경쾌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번 기획이 아르코미술관의 소장정책과 작품유통에 대한 모색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볼 때 이 전시는 소장의 의미와 소장품 활용의 현재를 말해주고 있다.

기획전이라는 개념이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도입된 1990년대 이전의 미술관 전시는 해외교류전이나 협회전, 대회수상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장품 전시였다. 하지만 최근 20년간의 소장품전은 기획전 사이를 메워주는 전시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기획전 기간을 아차하고 지나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소장품 상설전’이라는 팻말을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소장품전시는 기획의 색을 입고 의미 있는 재해석의 대상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아르코미술관 수장고에서 먼지를 털고 나온 이미지들은 반갑고 새로운 해석들도 즐겁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 더 이상 미술의 묘지가 아님을, 수장고가 이미지의 종착역만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우리 국립미술관의 기능과 역사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이미지 제공_ 아르코미술관

 1979년 서울생. 헬로우뮤지움 큐레이터. 최근 글로 「한국 동시대 미술기획에 대한 슬픈 테러」, 「미술관이란 낯선 공간에서 만나는 이상한 장난감」 등. ernst79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