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바다에서 왔다. 바다를 제패하지 않고 제국주의 국가가 된 나라는 좀처럼 없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는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최남선은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란 시에서 바다를 강조했다. 그에게 바다는 문명의 보배이자 지식과 지혜의 곳간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제국 소년들이 지녀야할 정신은 바로 모험정신과 개척정신이었다. 바다야말로 대한제국 소년들의 개척정신 향상 프로젝트를 실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쉽게도 최남선의 이런 생각은 이미 때늦은 감이 있었다. 거대한 증기기관을 장착한 군함과 상선들이 벌써 대한제국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76년 개항은 단순히 항구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국(開國)’과 같은 의미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적 근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등에 업고 조선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그전에 조선의 중세적 질서는 조금씩 균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그 조짐은 다름 아닌 서양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16세기부터 해안에 출몰하던 수많은 서양의 배들이 조선을 향해 잽을 날렸다. 일본은 무수한 잽을 맞고 휘청거리던 조선에 마지막 카운트펀치를 날린 것뿐이었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는 16세기부터 1860년대 초까지 조선을 향해 잽을 날렸던 서양이라는 타자의 역사를 다룬다. 저자는 이양선(異樣船)의 출현을 통해 한국의 불구적 근대의 기원을 탐사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객처럼 찾아온 서구적 근대를 대면한 조선인들의 모습과 그 자객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을 오버랩하면서, 서양이라는 타자와 그 타자를 통해 발견된 자아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재구성해낸다.

이양선들이 조선의 해안에 출몰한 것은 단순히 표류에 의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식민지 개척이 그 목적이었다. 서양인들은 학술조사와 지리조사 등의 위장술을 통해 식민지 개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조선도 서양을 알지 못했고, 서양도 조선을 잘 알지는 못했다. 서로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만이 가득했다. 저자에 따르면 『하멜표류기』(1668)는 그 대표적인 책이었다.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하멜(Hendrik Hamel, ?~1692)이 쓴 『하멜표류기』는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널리 알려, 조선을 탐사하려는 서양인들에게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하멜표류기』는 “비(非)그리스도교적 야만인이라는 두려운 이미지를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조선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심어주었다.”(127면) 이런 상황은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멜표류기』가 조선의 ‘식인풍습’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서양에 소개했다면, 조선 역시 서양인들의 ‘식인풍습’을 사실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도 언어도 사상도 서로 달랐던 서양과 조선의 만남. 그들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허구의 이미지만으로 겉돌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다르기에 필담(筆談)을 했지만, 필담도 맥을 못 췄다. 아예 자신이 말하는 바를, 원하는 바를 그림문자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양은 조선이라는 “거친 야생을 에덴으로 바꿀 수” 있다면, “복음이 이 땅으로 스며들고 진실로 받아들여진다면 비참은 그칠 것”(248면)이라고 믿었다. 이에 대해서 조선은 “굿을 해서 도깨비(서양-필자)를 쫓는 수밖에 없다”(428면)고 판단했다. 서양과 조선의 진정한 소통과 교섭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민중들의 자발적 행동은 아니었다. 조정 관료들의 강경한 쇄국정책은 서양에 대한 인식을 더욱 맹목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과 서양의 사상적·문화적 충돌지점을 외국인들의 일기, 여행기, 항해일지, 보고서 등 우리에게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와 그에 대응하는 조선의 무수한 자료를 통해 조선과 서양의 교류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였다. 비록 조선과 서양의 소통이 식민지정책과 쇄국정책의 대결구도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이양선의 출현은 조선의 중세적 질서에 균열을 내기에 충분했다. 그 균열 속에서 싹튼 사상적·문화적 변동에 대한 총체적 보고서가 바로 이 책인 셈이다. 이제 남은 작업은 바로 ‘우리는 세계를, 서양을 어떻게 탐사하고 발견했는가’에 대한 섬세한 고찰이다.

李承元 1973년 전남 고흥생.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최근 글로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근대전환기 기행문에 나타난 세계인식의 변화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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