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가사키(長崎)다. 후쿠오카(福岡)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남짓 달린 뒤였다. 기차에서 내리자 하얗게 눈부신 햇살이 맞아주었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오니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렀고 그 아래 층층이 계단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집들이 보였다.
나가사키는 내게 로망의 장소였다. 나가사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게게(解夏)>(2003)를 통해서다. ‘여름의 끝’이라는 의미의 이 제목은 선종(禪宗)과 관련된 말로, 우안고(雨安居)라고 하는 여름 수행의 마지막 날을 의미한다. 영화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베체트병(behcets disease)확실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만성 염증성 질환에 걸린 타카유키(隆之)의 이야기이다. 처음 병을 인지하고 시력을 잃어가며 괴로워하던 타카유키가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고 희망을 찾아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는 것이 주요 얼개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 영화가 특별해진 이유는 나가사키 때문이었다. 병으로 인해 도쿄(東京) 생활을 정리하고 타카유키가 찾은 곳은 고향 나가사키였다. 언덕을 오르면 바다가 보이는 작은 집,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국적인 학교건물과 새하얀 성당. 영화 내내 나가사키는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것 같았다. 또 다시 나가사키를 만난 것은 드라마 <사랑하는 그대에게(愛し君へ)>(2004)를 통해서였다. <게게>와 비슷한 설정의 드라마인데, 신기하게 이 드라마에서도 병든 주인공은 도쿄를 떠나 나가사키를 찾는다. 왜, 나가사키였을까.
그라바엔에서 바라본 나가사키
나가사키의길
육지로 깊숙이 파고드는 나가사키만(灣)을 이나사산(佐山)과 콘피라산(金比羅山)이 양팔로 감싸고 있는 품 안에 나가사키시(市)가 위치한다. 평지가 별로 없어 작은 시가지를 벗어난 주택들은 주로 언덕에 층층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좁은 골목길과 초록 넝쿨의 돌담이 나가사키만의 아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도로에는 아직도 노면전차가 달리고 있고, 뱃고동과 함께 어디선가 나비부인의 아리아가 들려올 듯하다.
정오쯤 나가사키역을 빠져나와 나가사키 짬뽕의 원조라는 시카이로오(四海樓)에 들렀다. 뽀얀 우유빛 국물에 숙주나물이 조금은 많다 싶을 만큼 올라있는 짬뽕은 진하고 고소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점심을 먹고 서둘러 길을 잡았다. 오페라 <나비부인Madam Butterfly>의 배경인 그라바엔(グラバ園)을 찾아나설 참이었다. 널찍한 돌로 다져놓은 좁은 골목을 올라가니,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성당 하나가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오랜 역사가 묻어났다. 이것이 바로 오오우라천주당(大浦天主堂)이다. 오오우라천주당은 1864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1653년 아시아 포교를 위하여 프랑스에 설립된 카톨릭의 해외전도단체의 쁘띠장(Bernard T. Petitjean, 1829~1884) 신부와 퓌레(Louis-Th럒dore Furet, 1816~1900) 신부가 설계하고 건립했다. 1597년 일본 조정의 카톨릭 탄압으로 순교한 26인의 성인을 기리고 있어, 정식 명칭은 일본26성인순교성당(日本26聖人殉敎聖堂)이라고 한다. 성당은 성인들이 순교한 니시자카(西坂)언덕을 향하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성당으로, 일본의 국보이자 일본 카톨릭교회를 대표하는 건물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계단을 오르면서 올려다보도록 설계되어 있어 더욱 당당해 보인다. 녹색의 팔각첨탑, 황금제대(祭臺)로 유명한 화려한 제단과 스테인드글라스, 고딕양식과 바로크양식이 섞인 외관이 매우 아름다웠다. 스테인드글라스는 100년 전에는 프랑스산이었지만 원폭 피해로 상당수가 파괴되었고, 지금은 그나마 남아있는 부분조각과 새로 복원한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오오우라천주당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1933년이다. 그 뒤 원폭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1959년에 복원되었다. 조용히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성당을 둘러보았다. 높은 천정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알록달록 포근한 햇살, 가만히 눈을 감고 기도하는 마리아상, 금방이라도 웅장한 소리가 울릴 듯한 고풍스런 오르간,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기도했을 긴 의자. 카톨릭을 종교로 가지고 있지 않은 나조차도 그 포근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오오우라 천주당
나가사키는 일본 기독교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신도(神道)와 불교를 주 종교로 삼고 있는 일본에서 성당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1550년 포르투갈의 배가 나가사키현() 북부에 위치한 히라도(平)섬에 처음 내항하면서 나가사키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서양인들은 무역활동의 바탕이 곧 선교활동이라 여겼고, 처음 무역선이 들어서면서부터 포교활동을 펼쳤다. 당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카톨릭을 주로 믿었으며, 영국과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가 대세였다. 포르투갈 무역선을 타고 첫 발을 내딛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신부가 처음으로 일본에 카톨릭을 전파했다. 이렇게 나가사키는 일본 기독교의 첫 전파지로 지금까지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성당들이 남아있다.
오오우라 천주당
또한 이런 성지(聖地)로서의 이미지와 함께 나가사키의 이미지를 만드는 사건으로 원폭 사건을 들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 피해지로 히로시마를 떠올리지만, 나가사키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미쓰비시(三菱)조선소가 자리잡고 있어 원폭 투하지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한 순간 반경 2킬로미터가 불타버렸고, 7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작은 마을에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었을까. 현재 나가사키시의 평화공원에는 평화기념상(像)이 있다. 이 기념상은 키타무라 세이보오(北村西望, 1884~1987)가 ‘평화는 나가사키에서’라는 주제로 1955년에 완성한 조각상이다.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영원한 세계의 평화를, 살포시 감은 눈은 희생자의 명복을 기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폭으로 무참히 쓰러졌던 나가사키는 그 아픔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감싸고 치유한 것이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조그마한 항구도시다. 하지만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나가사키는 성모 마리아의 품 안에서 아픔을 치유하고 평화의 이름으로 재생되었다. 우연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한 모습으로 미루어보아도 나가사키는 그렇게 이미지화되고 있지 않은가. 이번 나가사키 방문은 유독 짧아서 더 아쉬웠다. 하지만 언제고 힘들고 지칠 때 다시 그 작은 항구도시를 찾으면, 나에게도 따뜻한 위로와 평화가 찾아올 것만 같다. 지금 나가사키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미지 제공_ 필자
康惠林 1981년 대전생. 인천문화재단 전문위원. 최근 글로 「드림 소사이어티 삼청동」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