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정현의 작품세계는 우선 재료의 선택과 이에 대한 해석방식의 독창성에서 출발한다. 그가 문명사회의 편린들이라 할 수 있는 철도 침목,선로 아래에 까는

 

나무나 콘크리트로 된 토막 아스콘,아스팔트 콘크리트 조물주가 만들다 방기한 막돌이나 석탄덩어리, 그리고 콜타르(coal tar)석탄을 고온건류할 때 부산물로 생기는 검은 기름 등을 작업재료로 선택해 온 것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대신 재료를 드러냄으로써 작가의 개성과 독창성을 주된 가치로 삼는 모더니즘 조각 영역에서의 일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작품을 제작하는 가운데 조물주와 같이 전지전능한 전권을 휘두르며 작업의 모든 과정을 관장하는 모더니즘적 형식주의도, 예술을 소통의 도구로 간주하는 리얼리즘적 접근방식도 그의 예술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지 않다는 말이다. 정현의 작품이 포괄하는 추상적 외연과 철학적 내포는 또 다른 수많은 의미들로 증식되거나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이 된다.

물질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추적하는 방식은 조각가 정현 작품의 본류를 형성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양파껍질을 계속 벗겨내어 그 핵심을 들여다보더라도 결국은 양파조직만 드러나듯이 어떤 물질도 그 철학적 의미를 간과한다면 물질 자체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술가는 숙명적으로 헤파이스토스(Hephaistus)신들의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던 올림포스 12신의 하나의 후손일 수밖에 없다. 미적 욕망주체인 작가가 아무리 사심 없이 물질에 접근한다손 치더라도 외적 또는 내적 동기에 의해 작품을 구상하거나 특정한 의미를 지닌 사물로서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하여 창의력과 기술을 동원하고 싶은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정현(Untitled) , 130 x 67 x 104cm , Steel, 2008

마찬가지로 이번 개인전에서 그가 철이라는 재료에 매료되어 접근하는 과정은 그가 천성적으로 조각가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건설현장의 폐자재를 작품의 재료로 활용한 점은 이전에 그가 철도 침목이나 아스콘을 이용하여 예기치 않은 미학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과 상응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내밀한 간섭으로 장인적 공교함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작가는 철심에 철사를 세밀하게 붙여가는 장인적 노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이를 기반으로 조형적 리듬과 조각적 완성도를 이루어 내고 있다. 또 작가는 작품에 에나멜과 같은 도료를 입힘으로써 고귀한 예술작품으로서의 조각의 존재감을 고양시키고 있다.

정현(Untitled) , 97 x 83 x 238cm , Steel, 2008

주지하다시피 정현은 전통적 조각의 범주 내에서 질료의 실험과 이의 파동에 따른 생명성의 구현에 초점이 맞추어진 건강한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그의 작품에서 에너지의 구현방식은 보편과 특수의 관계로 규정될 수 있는 다이내믹한 요소라기보다는 개별 예술작품뿐 아니라 예술 자체 내에 들어있는 깊은 모순이나 풀 길 없는 긴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작가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어버이가 자식을 다루듯이 매만지고 쓰다듬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조각적 향취를 선사한다. 늘씬하게 허공을 차고 나가는 자태는 재작년 〈올해의 작가전〉에 출품했던 전주(電柱)의 기상을 닮아있으나, 재료를 자르고 갈아 용접하여 이룬 단단한 부드러움은 본질적으로 그가 추구해 온 인체와 닮아있다. 그리고 여전히 거칠고 투박하며 원시적 물성을 풍기고 있다. 이는 조각가가 생래적(生來的)으로 예쁜 조각 또는 통상적인 조각의 형태를 배척하고 자연과 삶의 본질을 추적해 왔다는 점에서 공감을 유발한다. 이러한 공감은 조각가로서의 소명과 자신감, 존재와 삶에 대한 탐구, 건강한 긴장미를 통한 에너지의 발현, 사물의 본질을 투영하고자하는 작가적 의지 등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이미지 제공_ 학고재갤러리

李卿模 1963년 충남 당진생. 미술평론가. 저서로 『인천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한국의 퍼포먼스아트; 다양성과 개별성이 조화된 총체예술』 등. mogar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