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고 세상을 만드셨건만 어떤 사람에게는 빛도, 세상도 없으니 참 불공평한 일이다. 내가 보고 있는 이것들은 온통 빛이 반사된 것이라는데 어떤 사람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 있으니 참 답답할 것이고, 나는 밤에 뜬 별을 세는데 어떤 사람은 별 없는 밤을 지새우니 참 지루할 터이다.
전도진,오돌도돌하게 돋은 한지의 원형을 만진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의 어둠에 별을 박아주고 세상을 보여주었다. 바로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 1888~1963) 선생이다. 1926년 박두성 선생은 한글점자인 훈맹정음(訓盲正音)을 만들었다. 종이 위의 올록볼록한 점은 시각장애인의 머릿속에 반짝반짝 별이 되었다.
내가 한글점자를 처음 만난 건 민우를 통해서였다. 교회학교 첫 제자였던 민우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민우는 점자판과 점필을 꺼내 배운 내용을 꾹꾹 눌러 점자로 기록했다. 별 같은 점을 찍는 민우가 신기했다. 5년 후 봉천동에 있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점자를 배운 나는 여기저기 점자를 찍어댔다. 다니던 회사 사람들의 명함에 점자를 찍어줬고, 지하철이니 엘리베이터니 계단이니 하는 곳에 있는 점자를 읽어댔다. 그 별 같은 점을 해독하는 내가 신기했다.
박두성선생의 점자 일지. 선생의 작업은 수학자의 작업같다.
그렇게 점자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8년이 지난 이제야 박두성 선생을 만났다. 한글을 쓰지 못하게 일본 군인들이 총을 들고 다니던 그 시절 박두성 선생은 한글 점자를 만들겠다고 했단다.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시각장애인 아이들을 굶지 않게 가르쳐야겠다고 했단다. 선생의 시력이 떨어지고 있는데도 점자 찍기를 멈추지 않았단다. <손끝으로 보는 세상展> 전시실에 있는 점자 일지와 점역된 책들은 그의 노고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전시실 한쪽에서는 박두성 선생의 따님이 그의 일생을 증언해 주었다.
시각자앵인 어린이들이 읽는책, 왼쪽에는 점자로 내용이 적혀있고 , 오른쪽에는 만질 수있는 그림이 있다.
표정을 나타내는 입모양에 따라 그림재료의 촉감이 다르다. 화난 얼굴의 입은 까칠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박두성 선생은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가 만든 한글점자가 얼마나 우수한지 전시실 벽에 한가득 적혀있었다. 초성, 중성, 종성을 한꺼번에 적는 우리말을 영어처럼 가로로 풀어쓰고, 풀어쓰기에서 생기는 초성과 종성의 혼동을 막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자음과 모음의 기점을 달리해 식별하기 쉽게 하는 등 그의 작업은 수학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전시실 반쪽은 박두성 선생처럼, 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손으로 김홍도(金弘道, 1745~1810전후)의 그림을 보고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색감을 느낀다. 감촉으로 검정색을 느끼고 소리로 소라를 인식한다. 오르골의 나사를 조여 포푸리(potpourri)향을 맡고 오톨도톨하게 돋은 한자의 원형을 만진다. 눈을 감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이 작품들은 새로운 인식의 경험이었다. 박두성 선생의 말처럼 “도리어 손으로 만져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틀림이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김홍도의 그림을 보기 때문에, 소라를 보기 때문에, 검정색을 보기 때문에 ‘틀림이 많은’ 경험에 만족하고 있는지도.
박두성 선생이 사용한 점자 타자기
때때로 좁은 보행도로가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 때문에 더 좁아졌다고 툴툴댄다. 엘리베이터의 봉긋한 점자가 단지 버튼을 쉽게 찾을 수 있는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 덕분에 걷고, 봉긋한 점자 덕분에 보고 있다. 별은 따다주지 못할지언정 시각장애인이 아니라고 모른 척할 일이 아니다. 11월 4일은 우리나라 점자의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