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이하 EIDF 2008)EBS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 2008이 ‘차이와 다양성을 넘어서(colors 360°)’라는 주제로 열렸다. 21개국 43편의 작품이 EBS 채널을 통해 방송된 이번 페스티벌에서 내 관심은 네 편의 영화에 집중되었다. 개막작이자 뉴저먼시네마(New German Cinema)1의 거장인 베르너 헤어조그(Werner Herzog)의 <세상 끝과의 조우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2007)가 그 첫번째 작품이었다. <아귀레 신의 분노Aguirre: The Wrath of God>(1977)와 <피츠카랄도Fitzcarraldo>(1982) 등에서 야생의 자연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헤어조그를 감안한다면, 남극 맥머도기지(McMurdo Station) 주변의 자연풍광을 담으려는 그의 시도가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정복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문명을 무릎 꿇리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과 수천 피트의 수심 속에 고스란히 보존된 태초의 지구 모습을 담아낸 이 작품은 숭고 그 자체의 미적 쾌감을 안겨준다.
자나 브리스키(Zana Briski), 로스 카우프만(Ross Kauffman)이 공동 연출한 <꿈꾸는 카메라―사창가에서 태어나Born into Brothels> (2004)는 대상을 기록하는 카메라의 능력이 질퍽한 삶의 구렁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나 브리스키는 콜카타(Kolkata)의 어느 사창가 아이들에게 사진찍기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사진, 어둠상자 속으로 비친 한 줄기 빛의 흔적. 어미는 몸을 팔고 술 취한 포주 아버지는 비틀거리고, 자신들은 집안의 모든 살림을 떠맡아야 하는 절망적인 삶, 그들에게 카메라는 심연에 찾아온 한 줄기 희미한 빛이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통해 꿈꾸는 세상을 본다. 카메라 렌즈에 비춰지는 세상은 그들 눈동자에 비춰지는 세상보다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말미, 그 ‘자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의 근황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내가 방송되기를 기다렸던 최고의 기대작은 <세상 끝과의 조우>와 <꿈꾸는 카메라―사창가에서 태어나>가 아니었다. EIDF 2008의 마지막 상영작!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가 ‘창궐’하던 무렵, 알랭 레네(Alain Resnais), 아녜스 바르다(Agn뢵 Varda), 조르쥬 프랑쥬(Georges Franju) 등과 함께 또 다른 흐름(흔히 좌안파라고 부른다)을 이끌었던 크리스 마르케(Chris Marker)의 <라 제테la Jet럆>(1962)와 <태양없이Sans Soleil>(1983). 〈라 제테〉가 크리스 마르케의 시작이라면, <태양없이>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테리 길리엄(Terence Vance Gilliam)의 <12 몽키스Twelve Monkeys>(1995)의 원작이기도 한 <라 제테>는 3차대전이 끝난 가까운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에 파견된 어느 남성에 대한 영화이다. 이 작품은 행동의 재현과 절연한 채 스틸 사진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박물관 시퀀스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적인 시간의 관념을 무너뜨린다. 이 세 시간의 개념이 서로 충돌하며 다양한 빛으로 반사되는 ‘크리스털 이미지’의 진가를 보여준다.
무소르크스키(Modest Petrovich Musorgskii, 1839~1881)의 동명의 곡에서 제목을 차용한 〈태양없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의 일본 탐사기 『기호의 제국』을 카메라로 옮겨 쓴 듯한 작품이다. 영화는 가상의 촬영감독의 편지를 받은 여자가 그것을 읽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크리스 마르케는 이미지와 사운드트랙을 상호자율적으로 중첩시켜 조화라는 이름 아래 유기적 전체를 추구하는 영화적 관습에 반기를 든다. 그 과정에서 너무도 자명한 것처럼 보였던 일상의 문화적 기호들은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변모한다. 마치 정면을 응시한 채 마스크를 벗으면 그 이면에서 기이한 형상의 얼굴이 드러나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어쩌면 크리스 마르케는 <태양없이> 그 자체를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하나의 수수께끼로 연출하려 했는지 모른다.
이 작품은 현대 일본과 기니비사우(Guinea Bissau) 등 아프리카 독립국가의 몽타주 이미지 속에 생존의 극과 극을 병치하고, 일본의 소프트 포르노그라피(soft pornography)에서 종교적 비의(秘儀)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죽음의 공포를, 지하철의 풍경에서 정지된 시간의 이미지를 발견하고자 한다. 양화(positive image)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그것을 궁극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음화(negative image)의 세계를 보여주려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겉보기의 리얼리티가 다큐멘터리적 진실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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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60년부터 1970년에 걸쳐 서독영화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으로 전후 독일영화의 미국화와 독일인의 정체성, 현대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산층의 물질주의적 가치관과 비인간화의 요소 등을 묘사한 것이 특징임.
안시환필명 1974년 인천생. 영화평론가, 중앙대 강사. 최근 글로 「무협영화, 후 진취앤에서 장 이머우까지」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