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생각으로 집어 들었지만 곧 생각을 바로잡았다. 예술성을 지향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미덕은 충분히 넘치는 소설이란 판단이 선 것이다. 조선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 일어난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의금부 도사 이명방을 축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의 재미는 그 추리의 기발함보다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사상의 충돌을 꼼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역사추리소설 혹은 팩션(faction)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 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조선역사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 유익하고 재미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재했던 인물들이라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나 시, 사상 등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까맣게 잊고 있거나 전혀 몰랐던 새로운 지식이 쑥쑥 늘어간다. 소설은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던 백탑파(白塔派) 박지원, 박제가 등 백탑(원각사지 10층석탑)을 모임장소로 삼았던 조선 중기 실학자들을 가리킴들의 배경과 사상의 연원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소설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등 실존인물들이 그냥 스치듯 나오는 게 아니라 이야기와 긴밀한 연관이 있어 다음을 궁금하게 만든다.
살인사건을 매개로 드러난 시대와 사상의 변화 조짐은 대사 하나하나에서 나타난다. 소설의 대화에는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자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려는 자의 사상충돌이 드러나 있다. 저자 후기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런 두 충돌은 오늘날의 정치대립을 연상케 한다.
또 다른 유익함은 소설 속에 구사되어 있는 낱말이다. 저자는 우리 고문(古文)의 한자 어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그 어휘들은 과거에만 사용했던 사어(死語)가 아니라, 오늘날도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으며 오히려 현대어와 섞여 매혹적인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한자 어휘만을 썼다고 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저자는 자신이 고른 한자 어휘 뒤에 반드시 괄호를 치고 그 뜻을 달아 이해를 도왔다. 이런 점이 미덕이긴 하지만 소설을 읽는 속도감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리는 단점도 있다. 읽는 도중 차라리 밑에 주석을 달아 놓는 방식이었더라면 읽기가 좀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의 전체 형식은 안정되어 있으나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의욕대로 단순 추리소설만의 재미가 아닌 독자에게 교양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다 보니 사건의 진행이 다소 완만하고 단순하다. 김진이라는 천재를 등장시켜 불가능해 보이는 추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장단점을 다 갖고 있는 듯싶다. 천재의 설명을 듣고 있는 것은 짜릿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천재성을 보이기에, 사건의 맥을 하나씩 짚어가는 독자의 재미를 빼앗아가는 기분이 든다.
솔직히 김탁환에 대한 선입견이 좀 있었다. <불멸의 이순신>(KBS1, 2004~2005)이 방영될 즈음, 유사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기에 그저 그런 유행 작가가 아닐까 했다. 이전에 봤던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2005, 이가서)의 몇 가지 실험적인 시도가 좀 가볍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부여현감 귀신 체포기』를 읽을 때, 내용은 재미없는데 문장은 좋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울림이 있거나 인상 깊은 미문도 아닌데, 왜 문장이 좋다고 느꼈을까. 그것은 『방각본 살인사건』을 접하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단락을 제대로 가르지 못하면, 의미와 의미가 어중간하게 섞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애매해지고 마는데 김탁환의 글은 단락 구분이 정확하다. 그의 글처럼 정확하게 맺고 끊어지는 단락을 요즘 못 봤다.
김탁환은 앞으로도 소설의 주인공인 이명방과 김진을 내세워 교양역사소설을 선보이겠다고 하는데, 진심으로 성원하고 기대한다. 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적당히 쓰인 역사소설과 차이가 있는 소설을 지속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짜릿한 즐거움이다.
崔敏鎔 1967년 경기도 동두천생.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 scenemy@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