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중문학은 늘 상황이 어렵다. 물론 가끔은 어느 한 분야가 붐을 이루며 활황장세를 이끌기도 하지만 곧 인기가 사늘하게 식어버리기 일쑤다. 추리소설 또한 다르지 않다. 그동안 국내작가의 추리소설은 좀체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기대해도 좋다고 할 만한 상황조성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무엇보다 과거에는 해문, 태동 등 그야말로 손에 꼽을 정도의 출판사만이 꾸준히 추리소설을 펴냈지만 최근에는 추리소설 분야에 뛰어드는 출판사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임프린트(imprint)특정 출판사 소속의 별도 출판사 시스템을 도입한 대형출판사는 추리소설 전문 브랜드를 두고 매우 적극적으로 책을 펴내고 있다.

현재 국내추리소설 시장은 미국발(發) 팩션(faction), 일본추리소설, 국내작가의 팩션 등이 주도하고 있다. 2004년에 댄 브라운(Dan Brown)의 『다빈치 코드』가 폭발적 인기를 끈 뒤 팩션의 출간은 크게 늘어났다. 일본소설이 대거 베스트셀러 상위에 진입하는 바람에 ‘일류(日流)’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로 일본소설의 인기가 대단했지만 이제 일본소설 바람은 시들해졌다. 그러나 일부 작가는 여전히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요코미조 세이시(橫溝正史) 등의 추리소설은 매우 안정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국내 팩션작가로는 『뿌리 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이 흡인력 있는 소설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출판시장에서 팩션의 인기는 1990년대 초중반 지적 스릴러의 인기에 버금간다. 『쥬라기 공원』, 『폭로』, 『떠오르는 태양』 등의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테크노 스릴러 『펠리컨 브리프』, 『의뢰인』, 『타임투길』의 존 그리샴(John Grisham),법률 스릴러 『돌연변이』 『바이러스』, 『바이탈사인』의 로빈 쿡(Robin Cook),의학 스릴러 『붉은 10월』, 『바이러스』의 톰 클랜시(Thomas L. Clancy Jr.)군사 스릴러가 큰 인기를 끌었고, 그들의 스릴러물은 국내추리소설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며 소설시장을 주도했다. 혼돈이론과 첨단 유전공학이론, 법률 및 의학지식으로 무장한 데다 첨예한 사회적 관심을 시기적절하게 반영한 이들 스릴러물은 할리우드의 거대 영화산업과 결합하며 스릴러물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스릴러물은 20세기말의 혼란과 함께 급격하게 인기가 식어버렸다. 독자들의 관심이 지적 추리가 아닌 현실적인 생존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4년 이후 이 땅에 만개한 팩션의 인기는 1990년대의 지적 추리에 버금간다. 아니, 그 이상이라 볼 수 있다. 1990년대에는 그래도 국내 본격소설과 대중소설이 함께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 한국출판시장에서 국내소설은 공지영, 황석영, 김훈, 박완서 등 몇 인기 작가를 제외하고는 초토화된 상태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팩션이 꽃 필 충분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추리소설 장르가 고사상태에 빠져든 상황에서도 역사추리 장르는 언제나 주목을 받았다. 식민지배, 분단, 한국전쟁, 40여 년에 이르는 군사독재정권 유지 등으로 굴곡 많은 현대사가 역사의 가정을 원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 『마루타』(정현웅), 『영원한 제국』(이인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비명을 찾아서』(복거일) 같은 역사추리소설은 늘 인기의 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최근의 팩션 붐은 한국이라는 국지적 특성을 뛰어넘는 더욱 근원적인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첫째, 팩션은 디지털 정보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에 정보는 과잉생산 되고 있다. 또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신뢰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대중은 허구적인 이야기보다 구체적인 사실, 즉 팩트(fact)가 있어야만 신뢰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이론보다 사람과 사물, 사건 등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원했던 것이다.

둘째, 팩션은 검색이라는 인간의 독서습관과도 닮았다. 팩션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살인사건은 일종의 키워드다. 이 키워드(사건)를 해결하는 열쇠는 소설에서 제시하는 지식이다. 지식이라는 단서가 강요하는 것은 상상이다. 그런데 이것은 ‘검색’습관과 많이 닮았다. 지금 대중은 키워드를 ‘단서’로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그곳에서 제시되는 정보(지식)를 활용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때 인간은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인류가 지금까지 생산한 ‘모든’(물론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앞으로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지식을 통합해 문제해결 방법을 찾는다. 결국 독자는 팩션을 읽으며 인류가 생산한 지식들을 동원해 사건을 해결하는 셈이다.

셋째, 팩션은 1990년대의 지적 추리처럼 원 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에 매우 적합한 장르다. 소설(책)이라는 콘텐츠는 영상, 웹, 모바일, 게임, 상품 등 다양한 형태와 연결되고 있다. 출판, 신문, 영화, 방송, 음악, 게임 등의 산업을 통합한 콘텐츠 산업의 각 부분은 단독으로 존재한다기보다 서로 연결됨으로써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당연히 소설은 영화나 드라마와 결합해 강력한 이미지를 생성해야만 전 세계를 공략할 수 있다. 따라서 출판편집자에게는 편집력 이상으로 다매체로 연결하는 ‘매개력’이 중요해졌는데, 팩션은 그런 시스템에 매우 적합하다. 실제로 『다 빈치 코드』는 출간되기  9개월 전부터 웹에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전개했고 뒤이어 영화가 전철을 밟았다.

넷째, 팩션은 지적 유희에도 매우 적합한 장르다. 팩션을 우리는 인포테인먼트(infortainment)라 부른다. 보통 인포테인먼트는 정보(information)와 오락(entertainment)의 결합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엔터테인먼트를 오락이 아닌 무아지경으로 옮기면 의미가 확 달라진다. 엔터테인먼트는 중세 유럽에서 온 말로 무언가가 마음속으로 들어와서(enter), 상주(sustain)하는 상태를 말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늘 신을 생각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신 이외의 더 즐거운 것에 마음을 사로잡혔다. 엔터테인먼트는 신 이외의 것, 즉 무언가 신보다 더 재미있는 것에 빠져 ‘무아지경’이 되는 걸 뜻한다.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보를 취할 수 있는 팩션은 그래서 게임과도 경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오늘날 독자는 ‘어떻게 생각할까’보다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하는 소설을 즐기는데, 그런 경우에도 적합하다.

일본의 추리소설은 인간사나 가족사를 주로 다루면서도 환경오염, 노인공양, 입시, 이지메(イジメ)집단 따돌림 등 사회 구조적 병폐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내장돼 있다. 따라서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나아가 그에 대한 균형 잡힌 자신만의 시각을 확립할 수 있다. 일본의 추리소설은 단순한 오락용이 아니라 문학 본래의 한 목적인 자기성찰의 적절한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국내에서는 본격문학과 장르문학 모두에서 사회문제를 찾기가 어렵다. 오늘날 게임은 원룸에 살면서 휴대전화나 메신저로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발신하는 등 철저하게 ‘1인용’으로 생활한다. 우리는 그들을 개중(個衆, 개인+대중)이라 부른다.

개중이 아무리 사적 일상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모든 활동은 사회적 문제와 연결돼있다. 그런 점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국내소설에 식상한 개중이 일본추리소설을 읽으며 정서적 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한 번역가는 일본문화의 특질을 한마디로 ‘엿보기 문화’로 보았다. 실제 생활에서 철저하게 이웃과 거리를 두는 일본인들은 소설 등 문학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이면을 엿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웃과 격의 없이 지내는 문화를 미덕으로 삼았던 우리도 인터넷문화가 확산되면서 철저하게 개인주의 정서로 무장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일본의 문화가 오히려 정서적으로 맞아떨어져 일본소설의 마니아층이 늘어난다는 설명이다. 최근 방송에서 스타들의 사생활이 마구 까발려지고 그들의 맨얼굴 등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급격하게 늘어나며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국내작가의 추리소설은 아직 황무지와 다름없다. 『분신사바』(2004), 『이프』(2006), 『귀신전』(2008) 등의 공포소설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포작가로 공인받은 이종호처럼 특화된 분야에서 확실하게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작가가 없지 않지만 김성종의 뒤를 잇는 실력파 정통 추리작가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추리가 이렇게 추락한 것은 대여점의 득세로 시장을 키울 수 없었던 점, 김성종 1인 ‘독재’의 장기화로 유망신인이 등장하지 않은 점,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일이 끊이지 않았던 역사적 특수성,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작가의 부재와 그에 따른 출판사의 무관심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국내추리소설 시장은 불만 붙이면 마구 폭발할 정도로 충분히 끓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국내의 젊은 층은 <CSI 과학수사대>, <슈퍼 내추럴>, <넘버스>, <NCIS> 등 강한 스토리라인과 기발한 사건을 담은 추리소설 원작의 미국드라마에 푹 빠져있다. 그러나 영상은 영상일 뿐이다. 영상에 한계를 느낀 독자들은 책을 찾게 마련이다. 인터넷이나 영상은 이미 상상이 이뤄진 것이라 그냥 즐기면 그만이지만 책은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팩션, 일본추리소설, 한국형 팩션 등은 모두 영상과 책이 결합하는 최근의 흐름을 타고 있다. 사실 요즘은 상상력이 문제일 뿐 본격소설과 장르소설의 구분도 무의미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상상력이 넘치는 국내추리소설의 대가들이 연이어 등장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빨리 그런 작가들이 등장해 좋은 작품을 연이어 내놓기를 기대한다.

韓淇皓 1958년 경주생. 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발행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저서로 『책은 진화한다』, 『위기의 책 길을 찾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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