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원각사(圓覺社)1908년 설립에서 처음 공연한 〈은세계(銀世界)〉는 우리 연극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으나 정확한 실체 파악과 평가에 아직 어려움이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으나 작품의 전체 내용과 장르 및 연출자에 대해서는 사실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은세계> 공연 관련기사와 광고는 1908년 7월부터 신문에 등장하는데, 그 중 다음 기사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대한신문> 사장 이인직씨가 아국(我國)우리나라 연극을 개량하기 위하여 신연극(新演劇)을 야주현(夜珠峴)현 신문로 전 협률사(協律社)에 창설하고 재작일(再昨日)그저께부터 개장하였는데 『은세계』라 제(題)한 소설로 창부(唱夫)를 교육하여 2개월 후에는 그 신연극을 설행한다.

_<황성신문(皇城新聞)>(1908. 7. 28.)

이후의 신문기사와 광고를 통해, <신연극 은세계>란 제목으로 1908년 11월 15일부터 원각사에서 공연을 시작했고, 배우는 당시 판소리 명창이었던 김창환(金昌煥, 1854∼1939) 등이었으며, 소설 『은세계』에서처럼 정감사가 최병도를 잡아다가 형벌을 가하여 재물을 탈취하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의 소설 『은세계』를 제재로, 판소리 창자들이 배우로 등장하는 신연극 <은세계>가 최초의 서구식 극장 원각사에서 공연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애초 신연극 <은세계>를 주도적으로 준비한다던 이인직은 같은 해 8월에 일본연극을 시찰하러 갔다가 이듬해 5월에야 귀국했기 때문에 사실상 공연 준비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인직이 공연대본 작성까지는 참여했을지는 몰라도 연출에는 지속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당시 원각사에 소속된 배우들이 판소리 창자들과 가기(歌妓)들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창극이 가장 익숙한 장르였음에는 틀림없다. 물론 <은세계> 공연 준비기간이 3개월이나 된 것이 일본 신파극을 공연 장르로 채택하여 처음으로 연습했기 때문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나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원각사에서 일본연극을 연습한다는 기사는 이인직이 일본연극 시찰을 끝내고 귀국한 직후인 1909년 5월 15일에 나온다. 이것은 연극 <은세계> 공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1908년 11월 15일부터 공연된 연극 <은세계>는 창극이었으며 연출자 역시 창극에 익숙한 판소리 창자였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은세계>를 창극으로 볼 때 그것이 이인직이나 원각사가 표방한 ‘신연극’에 부합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근대극이라 할 수 있는가?

흔히 창극을 전통연극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은세계> 공연 당시 연극개량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창극 <춘향가>, <심청가> 등의 내용을 구태의연하다고 비판한 일 때문에 창극을 신연극으로 보는 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창극은 20세기 초 극장설립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무대극이다. 청나라 연극에 영향을 받았든 아니든 간에 창자들이 서양식 무대 위에서 배역을 갖춘 판소리 무대극을 창안해낸 것이다. 창극은 과거에 없던 ‘신연극’의 하나이다.

기왕에 거듭 논의된 바와 같이 창극은 이미 〈은세계〉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원각사는 <은세계> 공연 이전에 이미 판소리 창자 40명을 확보하고 있었고, 연흥사(演興社)1907년 설립 역시 1908년 5월에 <화용도(華容道)>〈적벽가〉의 별칭 를 공연하기 위해 판소리 창자 30명을 모집한 바 있다. 일인창인 판소리 공연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대규모 연행자는 필요 없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광무대(光武臺) 1898년 설립는 1907년 5월에 어린 소녀 둘이 김창환, 송만갑(宋萬甲, 1865∼1939)에게 판소리를 배워 각각 춘향과 향단 역으로 등장하는 연극 <춘향가>를 공연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연극’으로서 〈은세계〉의 의의는 무엇인가?

첫째, <은세계> 광고에서 ‘신연극’을 두드러지게 내세웠는데, 이때 ‘신연극’은 앞서 말했듯 새로운 장르의 연극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의 연극을 뜻했다. 즉, 춘향 이야기나 심청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은세계>의 내용은 연극개량을 요구해온 당대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원각사가 <은세계> 이후 기존의 <춘향가>, <심청가>를 공연하면 호된 비판을 받았던 반면 이인직 개인은 연극 재료로서 <은세계>를 제공한 것과 관련해 호평을 받고 나아가 <은세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작품을 창작하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그 주문 내용은 당대 정치현실을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수탈당하는 백성들과 부패한 지방수령을 중점적으로 다룬 <은세계>는 애국계몽기의 연극개량 요구에 부합한 거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둘째, <은세계>는 직업배우와 전문작가가 결합하여 만든 결과물로 이는 연극 생산방식에 획기적 전환을 이룬 것이다. <은세계> 이전의 창극은 판소리 창자들이 자신들의 전문 공연작품을 무대극으로 전환시킨 것으로서 이 점에서는 자생적인 발전이라 할 수 있으나 판소리 창자들이 판소리의 테두리에 갇혀 있어서 새로운 주제나 내용의 창극 작품을 만들기 어려웠다. 반면 이인직은 새로운 작품을 계속 쓰는 전문작가로서 연극의 제재를 공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물론 이인직이 처음부터 연극공연을 염두에 두고 소설 『은세계』를 창작했는지, 기왕에 써두었던 소설을 공연 제재로 활용했는지, 나아가 소설 『은세계』 내용 전체를 연극으로 공연했는지는 현재 알 수 없으나 이인직과 판소리 창자들의 결합으로 연극<은세계>가 산출된 것은 이른바 신연극에 해당하는 새로운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바람직한 구도였음에는 틀림없다. 다시 말해 연극작품의 생산과 공급 측면에서 ‘극장(원각사)-작가(이인직)-배우(판소리 창자)’의 분업과 협업체제가 성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은세계>를 최초의 근대극이라 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근대극의 개념을 정립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복잡한 논란이 뒤따르고 나아가 그 개념을 구체적인 작품에 적용하는 문제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우리가 20세기를 연 여러 가지 예술실천 중의 하나로 <은세계>를 평가한다고 하면 이 작품을 최초의 근대극이라고 한다 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물론 연극<은세계>가 20세기 한국연극의 주류를 연 작품이라 할 수는 없다. 창극은 20세기 한국연극의 한 흐름이긴 하나 주류라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 〈은세계〉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최초의 창극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세계>가 최초의 근대극일 수 있는 것은 앞에서 보았듯 20세기 초에 전개된 새로운 연극에 대한 요구에 최초로 부응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종래에 없던 상설무대 극장이 등장하고, 이 새로운 공연공간에 맞추어 창극이 새로운 연극 장르로 등장했으나 그 작품내용이 근대를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지 못한 상황에서 <은세계>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전에 없었던 전문작가와 전문배우의 협업방식으로 작품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원각사의 <은세계>는 무대, 극 양식, 극 내용 및 연극 제작방식의 차원에서 근대극으로 손색이 없는 첫 작품인 것이다.

金鍾澈 1957년 경남 창원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최근 저서로 『판소리사 연구』, 『판소리의 정서와 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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