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뒤메질

2008년 8월,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 소식이 들려왔다. 베이징올림픽의 열기가 한국을 뒤덮고 있을 때인데다 한반도에서는 멀고도 먼 흑해연안에서 일어난 일이라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전투 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필자가 그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전쟁의 불씨로 지목된 한 나라 때문이었다. 그루지야 내의 자치공화국 남오세티아(South Ossetia)가 바로 그 나라이다. 남오세티아가 있으니 북오세티아도 있을 터, 북오세티아는 러시아 내의 자치공화국이다. 남북분단 60년이 지난 한반도처럼 같은 민족이 두 개의 자치공화국을, 그것도 각기 다른 국가 안에 세운 특이한 경우이다. 남오세티아든 북오세티아든 한국인 중에서 이 자치공화국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고대신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 사이에선 스키타이(Scythian)계 신화와 한국신화의 관련을 논하면서 오세티아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스키타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북(北)코카서스 지방 오세티아인 사이에는 영웅 나르트(Nartes)들의 활약을 담은 이야기가 아직까지 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나르트 서사시」다.1 프랑스의 저명한 신화학자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럝il, 1898∼1986)이 채록하여 소개한 바 있는 이 서사시를 고구려신화와 처음으로 연결시켜 고민한 사람은 일본의 신화학자 요시다 아쓰히코(吉田敦彦)다. 「나르트 서사시」에는 “스키타이인의 신화 내용을 한편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다른 한편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의 기사와 비교해 보면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한 유사점이 수없이 발견”2된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고구려 건국신화와 연결시켜 볼 수 있는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가장 먼저,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琉璃王) 주몽의 아들 이 아버지 없이 자라다가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고 찾게 되는 과정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나르트 서사시」에도 우류즈메구(ウリュズメグ)와 헤뮤쓰(ヘミュツ)라는 쌍둥이 형제가 물 길러 나온 여인(예언자의 딸)의 물동이를 화살로 쏘아 깨트리고,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는 질책을 당하는 동시에 그들의 할아버지가 고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결국 할아버지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 BC 58∼19) 아버지인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인 유화(柳花)를 만나는 과정과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따르면 물의 신(神) 하백의 세 딸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가 웅심연(熊心淵)연못 이름에 놀러 나왔다가 해모수가 말채찍으로 땅을 그어 만든 구리집에 들어가 술에 취했는데, 해모수가 가로막자 두 명은 도망치고 유화만이 붙잡혔다고 한다.

「나르트 서사시」에는 역시 바다(물)의 지배자인 돈뱃튜르(ドンベッテュル)의 세 딸이 만병통치의 사과를 쪼아 먹으려고 비둘기로 변해 나왔다가 앞서 언급한 쌍둥이의 아버지 에후세르테구(エフセルテグ)가 쏜 화살에 그중 한 마리만 상처를 입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둘기가 흘린 피를 모두 모아 바다 속에 따라 들어간 에후세르테구가 결국 그 상처를 치료해주는데, 그 비둘기가 실은 돈뱃튜르의 딸 제라세(ゼラセ)로 그와 혼인하여 쌍둥이 형제를 낳은 것이다. 수신(水神) 또는 해신(海神)의 세 딸이 물 밖으로 나왔다가 그 중 하나만 붙잡히는(상처를 입는) 과정이 똑같고, 붙잡힌(상처 입은) 여인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남자와 혼인하는 화소(話素) 역시 같다. 에후세르테구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해모수가 하백을 방문하여 서로 자웅을 다툰 대목과 연결해볼 만하다.

 천신 타르타기오스상

이뿐만이 아니다. 쌍둥이의 아버지 에후세르테구도 역시 쌍둥이로서 에후사르(エフサル)라는 형을 두었는데, 제라세와 혼인하여 바다에서 사느라 잊고 지내다가 형을 찾아 부인과 함께 육지로 나온다. 그런데 쌍둥이를 구별하지 못한 제라세의 오인으로 인해 동생이 형을 죽이는 사단이 일어난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에후세르테구도 자기의 검을 형의 사체 가슴에 곧추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목숨을 끊는다. 이처럼 칼을 세우고 거기에 몸을 던져 죽는 특이한 자살방식은 부왕의 오해를 사자 벌판에 세워둔 창에 몸을 던진 유리왕의 태자 해명(解明), 부왕의 오해를 입고 칼에 엎어져 죽는 대무신왕(大武神王, 4∼44)고구려 3대 왕 의 아들 호동(好童)왕자의 방식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억측일 수도 있지만 제라세의 두 아들, 우류즈메구와 헤뮤쓰라는 이름 자체가 유리의 별칭인 유류(儒留), 동명왕의 아버지 해모수와 연결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한국신화 연구자들의 더 많은 관심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신화나 설화는 지역적 배경이 다르다 하더라도 닮아있는 경우가 많다. 하늘을 상징하는 인물이나 그 자손이 물(바다, 강)을 상징하는 인물이나 그 딸과 결합하여 시조가 탄생한다는 이야기 등은 그 전형이다. 해모수와 유화가 혼인하여 주몽을 낳은 이야기도 마찬가지인데,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BC 425)가 쓴 『역사Historia』에는 스키타이 민족의 시조 타르기타오스(Targitaos)가 천신 제우스(Zeus)와 보리스테네스강 현재의 드네프르(Dnepr)강, 러시아 남서부 소재 신의 딸과 혼인하여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유리왕 이야기에는 다른 설화와 연결시켜 볼 수 있는 요소도 있다. 어린 유리가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아래 아버지의 유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듣고 찾는 것은 중국의 『수신기(搜神記)』(4세기 경)에 소개된, 초나라 간장막사(干將莫邪)와 그의 아들 적(赤)의 이야기와 같다. 유리와 적은 모두 산을 헤매다가 결국 집안의 주춧돌과 소나무 기둥사이에서 아버지가 남긴 검을 찾는다. 그러나 이처럼 부분적인 유사성에 착안하여 무조건 서로를 연결 짓고, 나아가 민족의 원류로까지 소급하는 것은 어디로 보나 무척 위험하다. 하지만 한국 고대신화의 원형을 탐구하는 데에 새로운 자료와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나르트 서사시」에 대한 본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조르주 뒤메질의 프랑스어 채록본을 확보하여 분석함과 동시에, 오세티아 지역을 직접 찾아 그들의 서사시를 채록하고, 그들의 언어전통에서 각각의 인물명과 용어가 무슨 뜻인지를 살펴 한국의 고대신화와 비교해 보면 좀 더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특정분야의 전문가들만으로는 해내기 어렵다. 어쩌면 한국의 전문가들만으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그 결과가 실제 한국 고대신화를 해석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런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수만리 떨어진 곳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고대 한반도와 동북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어떠한 세계관을 가졌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한민족의 역사 속에 녹아있는 다양한 문화요소에 대해서도 더 깊이 탐구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꼭 되새겨 보아야 한다.

소위 말하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나 일본의 독도 인식과 같은 역사왜곡 문제가 한국인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자료를 찾아 확인하고 재해석하는 반성적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따라서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을 통해 환기한 분단민족 오세티아의 서사시가 우리 역사의 문제를 세계사적 시야에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국사교과서 개편 논란이 한창 뜨거운 요즘, 역사학자들을 제쳐놓고 교과서를 직접 수정하겠다는 교육과학기술부의 무모함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머지않아 한국을 둘러싼 역사왜곡 문제가 역사학자들의 손이 아니라 정치인과 교육과학기술부 관료들에 의해 해결될 것만 같아 마음 한편 든든(?)하다. 다만, 그 교과서로 공부한 우리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개방화, 세계화의 미래에서, 그들이 그렇게도 부르짖는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주)

1      吉田敦彦,『日本人の女神信仰』(靑土社, 1995), 166∼168면 참조.

2      吉田敦彦,『日本人の女神信仰』(靑土社, 1995), 167면. 저자는 거의 같은 내용을 『동아문화』 31집(서울대, 1993)에 「스키타이, 한반도 및 일본 신화의 관계」란 제목으로 기고한 바 있다.

金樂起 1970년 강원 평창생. 인천문화재단 기획운영팀장, 인하대 강사. 최근 글로 「고구려 수묘인의 구분과 입역방식」 등. garadal@ifa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