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토 연주자 타카가키 유키코 인터뷰
일시 : 2008년 12월 6일 오후 1시
장소 :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싸리재홀
진행 : 김창수_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지난 12월 6일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귀한 연주회가 있었다. 한국, 일본, 중국을 대표하는 현악기 금(琴)을 연주하는 자리였다. 이 연주회에서 뜻밖의 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 전통음악 계승의 선구자였던 미야기 미치오(宮城通雄, 1894 ~1956)의 마지막 제자 타카가키 유키코(高垣幸子)가 바로 그다. 미야기 미치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일본 전통음악에 서양음악의 요소를 처음으로 접목시켜 ‘신일본음악’을 새롭게 이끌었다. 연주가일 뿐만 아니라 작곡가, 새 악기의 창안자로서도 일본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미야기 미치오는 자신의 대표곡들을 인천에서 생활하면서 작곡했다. 연주회 직전 타카가키 유키코씨를 만나 미야기 미치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창수 오후에 연주회가 있으신데,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인천에서의 연주가 선생님께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타카가키 네, 인천은 저에게 매우 특별한 곳입니다. 바로 저의 스승님이신 미야기 미치오 선생님이 자신의 음악활동에 많은 영감을 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 언제나 인천에서 코토(箏) 일본의 현악기를 연주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인천 공연은 저에게 있어 작은 꿈 하나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지요.
김창수 그럼 우선 일본의 코토에 대해서 좀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카가키 일본의 코토는 한국의 가야금과 비슷한 일본의 전통악기입니다. 이번 공연명에도 사용했듯 코토라고 해서 금(琴)자를 쓰기도 하고 쟁(箏)을 쓰기도 하는데, 쟁은 기둥이라고 불리는 아이보리색 지지대를 움직여 현의 음정을 조절하지요. 하지만 금은 그렇지 않아요. 엄밀히 말해서 제가 연주하는 것은 코토(쟁, 箏)입니다. 몸체는 오동나무로 만들고 소리를 결정하는 기둥은 상아(象牙)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현은 원래 명주실을 사용하지만, 1960년대 이후 일본 전통음악이 현대화하면서 매우 빠르고 격렬한 연주가 요구되니까 명주실 대신 나일론으로 만듭니다. 한국의 가야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쓰메(爪)라고 하는 손가락 끝에 끼우는 기구를 사용한다는 것이죠.
김창수 그럼 타카가키 선생님은 미야기 선생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습니까?
타카가키 유키코
타카가키 원래 제 고향은 홋카이도오(北海道)인데, 당시 선생님의 제자 중 한 분이 홋카이도오에 계셨습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의 음악을 듣고 반했지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에는 합주파트로 선생님 뒤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음색에 반해버렸지요. 그리고 그분의 인품에도요. 그래서 당시 미야기 선생님이 교수로 계셨던 도쿄예술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어간 해 미야기 선생님이 기차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 중에서는 제가 마지막이 되었지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선생님의 양녀이시면서 일본의 인간국보무형문화재이신 미야기 키요코(宮城喜代子, 1905~1991) 선생님께 사사 받았습니다.
김창수 홋카이도오에도 미야기 선생님의 제자가 많이 계신가요?
타카가키 홋카이도오에도 미야기회(宮城會)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내후년 그러니까 2010년 도쿄 미야기회 본부가 6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본부라고는 해도 주로 미야기 가문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홋카이도오는 그것보다 2년 먼저 조직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홋카이도오 미야기회의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미야기회 60주년을 맞아 홋카이도오에서 전국 미야기회 연주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김창수 미야기 미치오 선생님은 일본에서 어떤 분이신지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타카가키 선생님은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훌륭한 연주자셨고 작곡가이기도 하셨습니다. 또 선생님은 메이지(明治)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코토 연주의 스타일을 바꾸신 혁명가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 코토 음악에서는 4분 음표와 2분 음표만으로 곡이 이루어졌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연주할 선생님의 곡인 <세오토(瀨音)>여울 물소리는 주로 셋잇단음표를 사용합니다. 이 셋잇단음표는 서양음악에서는 있었던 것으로 일본 전통음악에서는 없었던 것이지요. 이외에도 스타카토(staccato)음을 하나하나 끊어서 연주하는 기법의 도입, 전통악기들의 하모니 구성도 선생님이 처음 시도한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접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음악의 반주에 사용하는 저음 악기인 17현을 처음으로 고안해 내기도 했습니다. 또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전통음악 분야의 오케스트라곡과 합주곡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미야기 선생님을 통해 일본 전통음악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창수 듣고 보니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대단하신 분인 듯합니다. 그런 분이 인천에서 활동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아시아 금교류회 연주회 팜플렛
타카가키 예, 미야기 선생님은 메이지 40년(1907년), 그러니까 당신이 13세 되시던 해부터 23세까지 인천과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그 당시 미야기 선생님의 아버님께서 일을 하기 위해 인천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폭동으로 몸을 다치게 되고 그런 와중에 미야기 선생님을 인천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선생님은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코토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님의 부름을 받고 인천에 와서 코토를 가르치면서 생계를 돕게 되었죠. 그런 생활 속에서 선생님이 작곡을 하셨고, 선생님의 대표곡들은 거의 대부분 인천에서 쓰인 것들이 많습니다.
김창수 코토를 가르치셨다면 어디에서 가르치셨나요?
타카가키 오랜 조사로 어렵게 알게 되었는데, 과거 인천사정소학교(仁川寺町小學校)현 신흥초등학교였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코토를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인천사정소학교가 높은 지대에 있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그 학교 아래에서 코토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학교 아래 소년선생님(學校の下の少年先生)’으로 유명했고 인천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주로 일본 사람들에게 코토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김창수 그럼 코토를 배운 사람들 중 인천사람들도 있었을까요?
타카가키 아마도 대부분 일본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부자들이나 그들의 부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 아사카와요정(淺川料亭)의 주인이 미야기 선생님의 재주를 어여삐 보고,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1909) 앞에서도 코토를 연주할 수 있게 자리를 주선했다고 합니다.
김창수 그렇지요. 그 당시 이토오 히로부미의 별장이 인천에 있었습니다.


아시아 금교류회 연주회 모습
타카가키 그랬습니까? 이토오 히로부미는 선생님의 연주를 듣고 감동받은 나머지 빠른 시일 안에 도쿄로 부르겠다고 했지만 그 말이 실현되기 전에 피살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후로도 10년 가까이 한국에 남아계셨고, 1916년에 대(大) 켄교우(檢校)옛날 장님에게 준 최고의 관직가 되셨습니다. 1917년에 도쿄로 돌아가셨습니다.
김창수 미야기 선생님인 인천에 계셨을 때, 선생님의 처녀작 <물의 변신(水の變態)>를 작곡하셨는데요. 이 곡에 대한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카가키 그 곡은 미야기 선생님 동생이 읽어주는 동명의 시(詩)를 듣고 그 감상을 음악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물이 비가 되고 안개가 되고 구름이 되는, 물의 변화를 소재로 한 곡입니다. 이 곡은 선생님의 처녀작이면서 대표곡입니다. 악장이 바뀔 때마다 그 변화가 매우 커서 좀처럼 아무나 잘 칠 수 있는 곡은 아닙니다. 매우 훌륭한 곡이지요.
김창수 마지막으로 앞으로 타카가키 선생님의 계획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카가키 인천은 선생님의 음악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곳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있어서도 인천은 매우 소중한 곳입니다. 오늘 공연으로 전 작은 소망을 하나 이룬 셈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루고 싶은 저의 꿈은 선생님께서 작품세계를 왕성하게 펼쳤던 그 인천사정소학교에서 선생님의 곡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미야기 미치오 선생님을 기억하고 계신 인천문화재단과 연구자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습니다. 미야기 선생님에 대한 숨겨진 자료를 찾고 기릴 수 있도록 인천의 문화관계자 분들과 미야기회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김창수 네, 숨은 역사를 찾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이해와 협력이 필요할 듯합니다. 리허설 시간을 뺏었는데,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공연 때 좋은 연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번역_ 康惠林 인천문화재단 예술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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