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창사특집극 <압록강은 흐른다>는 실존 인물인 이미륵(李彌勒, 본명 李儀景, 1899~1950)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미륵은 일찍이 낯선 독일 땅에서 독일어 작품을 통해 한국과 동양문화를 알리고 이산인(diaspora)1의 신산한 삶과 이중 정체성을 아름다운 글로 승화시킨 이산적 글쓰기2의 선구자이다.

이미륵의 자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1946), 중단편 소설과 속편 소설 등을 토대로 만든 이 드라마는 극적 전개를 위해 새로운 인물을 첨가하여 플롯을 재구성하고 있지만, 대체로 원작을 바탕으로 이미륵의 생애를 조명하고 있다. 한독 수교 125주년을 맞아 SBS와 독일 방송사 BR(Bayerischer Rundtunk)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전통과 근대의 대립,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조선, 나치 독일과 전쟁 등 역사의 파고 속에 부침하는 한 동양인의 삶을 잔잔한 감동 속에 펼쳐 보이고 있다.

좌_드라마 <압록강은흐른다>의 한장면 우_ⓒ 범우사 │2000    

드라마를 통해 그려지는 이미륵의 생애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1899년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난 이미륵은 천석꾼인 아버지 덕택에 유복한 생활을 한다.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신식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이미륵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수배 당하자 압록강을 거쳐 독일 땅에 이른다. 그는 뮌헨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 및 생물학을 전공하였으나 전공과 무관하게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자전 소설인 『압록강은 흐른다』로 크게 성공하자 이에 힘입어 독일에서 한국 및 동양을 알리는 선구자로 활약하다가 1950년 위암으로 독일에서 사망하고 만다.

 

드라마는 머슴에서 일제앞잡이로 변모한 원식과 반나치단체 백장미 단원 후버 교수를 통해 어지러운 당대 조선의 사회상과 파시즘체제의 독일을 그리면서 극적 전개를 꾀하고 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륵의 민족주의 사상과 극적인 삶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변전하는 네 명의 ‘미륵’의 운명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륵이  열렬히 희구했던 서구에서 어찌하여 한학과 서예, 동양학을 가르치고 한국을 알리면서 또렷한 동양인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는가이다. 즉, “외국 땅에 발을 딛는다는 것은 자기 조국에 발을 딛는 것이다”라고 했던 영국 작가 G. K 체스터튼(G.K. Chesterton, 1874~1936)의 말 그대로 유럽에 당도한 이미륵이 발견하고 또 골몰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식민지 조국과 고향, 동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①②③ ④⑤   ①이미륵과 고향 친구들 ②이미륵 ③이미륵과 한국유학생들 ④이미륵 최초 독일 무덤 ⑤1997년 이장된 이미륵 무덤과 그앞에 놓은 흉상(이미지 제공_ 이미를박사 기념사업회)  

 

원작의 핵심, 그리고 그것을 극화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할 문제 또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륵의 생애를 드라마화한 것은 사실 한국인이 아닌 독일인의 시선에서 비롯한 것이다. 독일인들이 이미륵의 고향 조선에 대한 향수어린 서정적 필체에 감동한 것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서구인들의 동양 인식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 이중의 시선, 즉 낯선 이국의 땅 독일에서 나라와 고향을 향수하는 이미륵의 시선과 그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 독일인의 시선을 어떻게 영상에 담을 수 있는가.

 

어떤 발언이든 그것은 분명하고 구체적인 입지에서 출발한다. 글쓰기의 ABC를 논하지 않더라고 모든 글과 말은 대체로 분명한 독자와 목적을 상정하고 있는 바, 따라서 작가는 강연처럼 그가 서 있는 강단의 물리적 시공간을 절대적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화자가 회상하는 유년 시절, 가령 사촌 수암과 천자문을 외우고 거북점을 치고, 붓글씨에 입문하여 먹칠을 하고, 꿀단지를 훔쳐 먹는 등등의 이야기는 한국 독자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륵의 친절한 묘사와 향수어린 회상이 향하는 것은 그러한 전통적인 풍습에 익숙한 한국인이 아니라 동양에 무지할 뿐더러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이다.

  드라마 <압록강은흐른다>의 장면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이 시선의 방향이 사실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운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이미륵은 작품과 그의 생애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이미륵은 줄곧 서구 문명을 동경하여 의학과 동물학, 생물학 등을 공부해온 과학도였다. 그런 그가 작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특별히 글쓰기를 좋아했거나 문학을 지망했던 것도 아닌 이 수굿한 청년이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일인 즉 타자의 시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뮌헨대학에 다니면서 흑인과 황인종을 구분하지 못할 뿐더러 인종차별의식에 사로잡힌 독일인들에게 끊임없이 핍박을 받고 모멸감을 느낀다. 이미륵은 버려두었던 자신의 기원들을 되짚어서 다듬고 타인들에게 펼쳐 보이면서 점차 ‘멋진’ 동양인으로 성장해나간 것이다. 서구 학문과 문명 이기를 향해 치닫던 그의 에너지가 막상 서구의 땅에 서자 오리엔트(orient)로 역류하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한국의 종교와 한국어를 알리는 글을 쓰고 『도덕경(道德經)』을 외우고 서예를 가르치며 ‘사해 내에는 모두가 동포다(四海之內皆同胞也)’『논어(論語)』라는 동양 현자의 말을 통해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이채로운 세계시민이 되어갔던 것이다. 하여, 이미륵이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세계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낯선 땅에서 느낀 자신의 타자성,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서 느꼈을 고통과 소통에의 열망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자신의 행로를 통해 국지전의 실체를 인류라는 보편적인 시각에서 통찰하는 거시적 안목과 동양적 유토피아 의식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또한 독일에서 오래도록 읽히는 기념비적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인간이 서 있는 한 뙈기도 안 되는 땅은 이토록 중요하다.

주)

1      고향땅을 떠나 다른 지역이나 국가로 흩어지게 된 현상, 혹은 민족집단이나 사람.

2      뚜렷한 목적과 지향성보다는 이산인의 이중 정체성과 문화적 혼종성 등의 상황을 드러내는 글쓰기.

鄭恩鏡 1970년 서울생. 원광대 문예창작과 전임강사. 최근 저서로 『한국 근대소설에 나타난 악의 표상』, 『디아스포라 문학』 등. lenestrase@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