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에 서서 타고 갈 기차를 기다렸다. 나를 태울 생각이 없어 서지도 않는 화물기차와, 고속전철을 지나보냈다. 머지않아 입구는 있되 출구는 없다는 무쇠기차도 그대로 떠나보내고, 주황빛의 기차, 둥근 선로를 자유롭게 유영한다는 기차를 선뜻 잡아탔다.

송암 박두성 선생님의 따님 박정희 여사의 생생한 증언을 듣다가 ‘날 잡아다 죽이면 할 수 없지만, 이 일을 해야겠다’고 하셨다는 박두성 선생님의 말씀이 깊이 마음에 남았다. 젊고 무지하고 나약한 나에게 이정표를 놓아주시는 듯싶어 가슴이 찡하였다. 길지 않은 인터뷰 내용이었지만, 생생한 문투와 정성 담긴 많은 사진에 감동의 잔상이 더욱 오래 남는다. 회갑을 맞이하여 찍으신 사진에는, 바로 곁 사진 속에 보이는 젊은 시절의 정확하고 곧으신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 무언가가 가득 차 있는 선생님이 웃고 계셨다. 아마도 사진관에 동행한 맹인 제자 여럿이 선생님과 사모님께 웃으시라 재촉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방문화통신의 군산세관에 대한 글을 읽었다. 「쌀 수탈 전진기지의 풍경」이라는 글이었다. 필자의 서정적인 필치가 자분자분한 발걸음으로 나를 군산으로 이끌었다. 군산세관에 가본 적 없는 나는 돌아오는 휴일에 혼자라도 한번 꼭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본식과 유럽식이 혼재한 아름다운 건물양식이라는 분석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워서, 자연스레 눈을 감고 근대의 생활상을 상상하도록 하는 정취 가득한 건물이었다. 이것이 잘 보존되어 박물관으로 이용된다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천항 가는 길에 남아있는 우정국 건물과 동인천 골목길에 있는 근대 건물들을 떠올려 보니, 늘 이국적이라 여겼건만 이것이 이국(異國)이 아니라 자국(自國) 근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조금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물론 역사 속 군산에 대한 우리의 비극적인 이미지상은 케케묵고 식상한 것이 틀림없지만, 군산세관을 방문하는 필자의 시선은 감상에 일관하는 듯하여 오히려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무언가를 뺀 듯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고정관념일 수 있겠지만, 탑처럼 쌓여있는 쌀가마니 사진이 담고 있는 비극적이고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현재의 경관에 대해 감상으로 일관한 글은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 것이 사실이다. ‘쌀 수탈 전진기지의 풍경’이라는 제목이 자연스레 주었던 연상이나 기대와도 조금 어긋난 느낌이었던 셈이다. 일제시대 군산에 거주했던 일본인도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시절이 잊히지 않아 가족들과 방문하곤 한다는데 하물며 피해자의 시선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아픈 기억을 접어 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또 하나의 편견이라 생각한다.

동아시아 문화비평지 <플랫폼>에는 느림과 빠름, 살아있는 역사와 현대의 날카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느꼈다. 재미있고 진지했으며 다양한 것들을 많이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말랑말랑하게 유연한 열린 사고의 비평지라는 생각이 들어 무척 반갑고 고마웠다. 앞으로도 좋은 화두로 나에게 말을 걸어 줄 것 같은 친구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