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오두막 같은 박물관 아니, 보는 이에 따라서는 누추한 골방 혹은 창고 같은 박물관의 느낌일 수도 있다.

지난 10월 중순부터 <미술정기간행물(이하 정간물) 1921~2008展>을 열고 있는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은 그 자체로 한국 미술판이 처한 외화내빈(外華內貧)의 현실을 표상한다. 전시장은 구멍가게만한 출입문 들머리에 작은 진열창을 잇대어놓은 것이 전부다. 그 뒤쪽 공간 대부분은 전시도록, 미술 관련서가 가득 꽂힌 100여 개의 6단짜리 책장이 채우고 있다. 작은 지하공간에 전시장과 자료수장고가 다닥다닥 엉겨 붙어 있는 풍경. 이런 열악한 공간이 과거 우리 근현대미술의 흔적과 산물을 찾는 데 기갈 들린 미술사 연구자들과 애호가, 작가들의 오아시스 구실을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고, 구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 닥친 불황 직전까지도 화랑들이 앞 다투어 해외지점을 개설하고 젊은 작가들의 국제전시 홍수에, 수백억 대의 경매 호황을 떠벌였던 미술판의 외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시설과 관람환경은 열악할지언정, 전시의 콘텐츠를 감상하는 느낌은 녹록치 않다. 식민지시대인 1920년대부터 올해까지 미술계 주요 정기간행물들의 변천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희귀자료전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명멸한 숱한 유명무명의 미술잡지와 동인지, 학술지 등이 출품되어 가시밭길의 역사를 걸은 한국 미술판의 지난날을 이미지로 증언하고 있다. 출품작 대부분은 한국미술판에서 전시도록, 책자 등의 자료수집 전문가로 이름난 관장 김달진(金達鎭)씨가 1970년대 초반부터 국내 전시현장 곳곳을 누비며 30여 년 발품 들여 모은 것들이다. 지금도 매주 빠짐없이 화랑가를 돌며 전시자료를 챙기는 그는 지난해 3월 제대로 된 한국미술아카이브사업을 하겠다는 발심으로 박물관을 개관한 바 있고, 수집 정기간행물만 골라 개관전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내부 미술정기간행물 전시장(이미지 제공_필자)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가는 들머리 입구에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라는 명판을 벽에 붙여놓고, 뒤이어 수집한 자료들의 장르별 계통도를 벽에 그려놓았다. 단행본, 화집, 정기간행물, 학회지, 팜플렛, 작가 개인파일, 신문기사 등이 컬렉션의 주요구성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셈인데, 실제로 전시실 진열장에서 만나게 되는 정기간행물 컬렉션들은 우리 미술사에 관심있는 이라면 누구나 눈여겨보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다. 종합지, 동인지, 전문지, 기관지, 학술지, 도록의 6개 섹션별로 정기간행물이 정리되어 있는데, 대부분 창간 당시의 발행호를 내놓고 있다는 점에서 컬렉션의 내공을 짐작케 한다. 일단 미술전문지의 경우, 최초의 미술잡지라 할 수 있는 <서화협회보> 창간호1921년 10월 발간를 비롯해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에서 진보적 미술인들이 낸 <조형예술>, 1950~1960년대 대표적인 미술잡지였던 <신미술>, 1976년 발간된 이래 지금은 <월간미술>로 바뀐 <계간미술> 창간호,1976년 1월 현대화랑이 1973년에 냈던 <화랑>, 선화랑에서 냈던 <선미술>(1979), 최근 박수근(朴壽根, 1914~1965) <빨래터> 위작설 제기로 파문을 일으켰던 <아트레이드>의 지난해 연말 창간호 등에 이르기까지 80여 년 잡지 발간사가 펼쳐져 있다. 기관지와 동인지로는 <논꼴아트>(1965), 한국전위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한국아방가르드협회의 기관지 <에이지AG>(1969)에서 시작해 100종 넘는 각종 분야 간행물들이 놓여 있다. 도록 측면에서 우리 근대미술의 달갑지 않은 지지대 중 하나였던 조선총독부 조선미술전람회의 1920년대 도록과 1930년대 이왕가미술관현재의 덕수궁미술관의 일본그림 컬렉션 목록, 해방 후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도록 등 눈길이 번쩍 뜨이는 자료들이 많다.

 

좌_전시장에 진열된 일제시대 1.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도록 (이미지 제공_필자) 우_미술정기간행물전 초대장    

이들 숱한 잡지들과 간행물들은 예술 의욕만 앞서고 제도적 인프라와 대중과의 소통은 미숙하기 짝이 없었던 우리 미술사의 지난 궤적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1990년대까지 창간호 혹은 2, 3호만 내고 폐간하거나 창간예비호만 내고 멈춘 잡지도 상당하다. 심지어 1963년까지 나온 <신미술>의 경우, 11호까지 정규 잡지로 나오고 이후 12, 13호는 미대 입시 문제집으로 돌변한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뜨거운 가슴만 있고, 냉정한 이성과 현실인식이 다분히 부족했던 지난 시절 미술판이 어쩔 수 없이 지녔던 공허한 얼개가 그 누덕누덕한 흑백, 천연색 표지와 헤어진 서구 현대미술품 도판, 고르지 않은 잡지의 글씨체에서 적나라하게 반증된다. 미술계의 현실에 착근하지 못하고, 경직된 중견작가의 작품소개나 추상적인 현대미술사조의 소개로 지면을 채웠던 1970년대 화랑 발행 미술잡지의 모습은 1980년대 <시대정신>과 같은 민중미술 동인지의 거칠고 투박한 메시지와 극명하게 대비되기도 한다. 이 작품들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정보들은 허락을 받고 그 뒤쪽의 서가에 있는 색인과 세부자료들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필자는 정식 전시출품작은 아니지만 이 박물관 한켠에서 또 다른 보물 컬렉션을 엿보는 재미도 누렸다. 김달진 관장은 전시를 보는 중에 필자를 불러 자신의 관장실로 데리고 가더니, 방 한쪽 벽에 무수히 꽂힌 검은색 파일첩들 가운데 두 개를 꺼내왔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남관(南寬, 1911~1990)의 인물파일첩. 그 안에 1970년대 이래 김 관장이 각종 잡지와 전시회 기록물 등에서 모은 두 사람의 기사 스크랩, 팜플렛, 도판 스크랩 등이 빽빽이 들어 있었다. 김환기의 대표작인 <론도>, <창>(1938) 등의 도판, 그리고 1971년 신세계화랑에서 열린 <김환기 근작展>의 고딕체 팜플렛을 읽었다. 남관이 1968년 <사상계>가 만든 춘곡미술상 초대 수상자(초대만 하고 없어졌다)로 선정됐다는 사실도 이 파일의 잡지 스크랩을 보고 알았다. 이렇게 모은 파일첩의 작가군만 250여 명이다. 김 관장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박물관의 보물”이라며 “이런 작가파일모음은 국내 어떤 기관에도 없는 것”이라고 자랑했다.

전시장은 눅눅해보여도 자료들의 얼개는 살뜰하다. 물론 특별한 전시기법이나 구성의 참신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술자료를 영역별로 갈무리하고 체계화하려는 한 수집가의 아날로그적 열정과 분류술의 공력 덕분에 작품과 다른 맥락에서 우리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비춰 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 뒷맛은 씁쓸함이 앞선다. 이번 전시가 198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한국근대미술자료展>에 이어 24년 만에 열리는 국내 미술자료전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잡지로 대표되는 미술정기간행물들은 한결같이 짙은 애수와 회한을 풍기면서 좁은 전시공간의 누추한 얼개와 잇닿는다. 21세기까지도 폐간, 속간의 부침을 밥 먹듯 거듭하며 양은냄비처럼 존속해온 것이 국내미술정기간행물의 숙명이었기에, 전시장에서 우리 미술의 누추한 역사가 보이는 건 당연해 보인다. 수시로 안에 습기가 차서 웅웅거리는 가전용 제습기로 물을 빼는 이 지하 박물관은 언제나 전시, 판매, 권력 쟁투에 눈이 팔려 미술자료 보존을 팽개쳤던 이 땅 미술인들의 겉과 속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 창고와 같다는 생각이다. 무료 미술소식지를 운영하면서 지면 광고로 생계와 박물관 운영비를 함께 해결하는 김씨는 “지하공간을 벗어나고 싶지만, 이제는 체념했다”고 말한다. 지난해 개관 때 적지 않은 기업들과 컬렉터, 문화관광부 2008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로 개편에서도 ‘잘한다’고 축하인사를 보냈지만, 그 뒤 돕겠다고 큰 손을 내민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예술아카이브사업은 가시적으로 성과가 드러나지 않으며, 시간이 흘러야 그 진가가 발휘된다. 눈앞의 이윤에 목을 매고 눈앞의 업적과 성과에 올인하는 돌격 철학이 만연한 대한민국에서 이 전시는 앞으로도 숱한 고비를 넘겨야할 운명이다. 김씨의 컬렉션을 포함해 점차 하나둘 세상을 뜨게 될 원로 작가, 원로 화랑주, 비평가 등으로부터 체계적으로 과거 미술자료를 넘겨받고, 증언을 확보하고 예술아카이브를 재구성하는 과제가 첩첩이 놓여있다. 그런 일들을 과연 나라의 정책 차원에서 벌일 그날은 언제 올까. 요즘 문화체육관광부의 관료들을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기엔 절망적인 거리감만 느껴질 따름이다.

盧亨碩 1968년 부산생. <한겨레>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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