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에 선다. 승객들이 전동차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신문을 보고 누군가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듣거나 옆사람과 담소를 나눈다. 누군가는 애써 추위를 견딘다. 곧 요란한 바람을 일으키며 전동차가 도착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탄다. 플랫폼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교차하며 소통하는 공간이다. 문화의 플랫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천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문화비평지 『플랫폼』이 50호를 맞았다. 『플랫폼』은 그간 국내외 문화 현상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있는 비평으로 문화의 ‘플랫폼’을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해왔다. 문화도 사람의 일인지라 그간 여러 인물들이 『플랫폼』의 지면에 오르내렸다. 문화비평은 문화적 현상이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인물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호가 발간되는 8년여의 시간 동안 그 시기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거나 본격 문화비평지로서 『플랫폼』이 변화를 추측케 하는 지표적 인물이 있다. 그처럼 특징적인 인물들을 간략하게나마 되돌아보는 일은 『플랫폼』이 50호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성이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지표적 인물들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플랫폼>의 발전 과정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플랫폼』 발행 초기에는 주로 『플랫폼』 자체의 정체성을 찾는 데 주력했던 듯하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본격 문화비평지로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고민이고 다른 하나는 중교과의 교역로이자 근대 개항지로서 '인천'이라는 지형적 공간적 정체성 찾기이다. 전자의 경우는 저널리즘 비평보다는 아카데믹한 비평들이 주를 이뤄 다소 현실과 괴리된 느낌이 많앗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국제도시로서, 또한 역사 속에서 독특한 개성과 가치를 지닌 도시로서의 면모를 확인하고 동아시아의 문화중심지로서 정체성을 탐색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의지가 엿보였다.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과 베트남, 미얌마, 싱가포르 등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최승희와 김용, 오정희는 특히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동아시아 문화가 상호 교류, 소통하며 인천이라는 국제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논하는 데 있어 특징적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플랫폼』은 하나의 큰 변화를 겪는다. 2008년 ‘제1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수상작을 게재한 것이다. 공연, 미디어, 미술, 음악 네 분야에 걸쳐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 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주요 장르 외에 미디어 분야를 추가함으로써 이후 디지털과 뉴미디어에 대한 관심의 양을 증대시켰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플랫폼』이 역사와 지역이라는 자연적 시공간의 영역을 넘어 인공의 시공간인 사이버 스페이스로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와 변화의 연장선에서 『플랫폼』은 통권 50호에 이르러 웹진으로의 전환을 꾀한다. 『플랫폼』의 웹진화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문화로 변모해가는 세대에 발맞춤과 동시에 일반 독자와의 소통을 보다 용이하게 하려 함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 전환이 시대에 기존의 미디어와 담화 방식에서 탈피해 뉴미디어의 욕망과 갈등의 양상을 탐색하고 이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사이버 문화를 대변하기에 뒤샹과 벤야민은 어쩌면 너무 오래 전 인물들인지 모른다. 그러나 디지털화라는 현재진행형의 변화와 이에 따른 문화적 다각화 및 예술창작 방식의 변화는 이들이 오래 전 했던 고민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제호를 거듭하면서 『플랫폼』의 기사들은 인물보다는 문화적 사회현상에 집중한다. 개별적 현상들은 구체적이며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플랫폼』이 초기에 보여줬던 현실과의 괴리나 아카데미 비평의 한계를 넘어 일반 독자들과 친화하며 현실 밀착형 비평지로 변모해가는 과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변화를 둘러싼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특히 세월호 참사는 모든 긍정적 판단과 전망을 중단시키는 사건이었다. 세월호에 대한 직간접적 영향은 온 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사회와 문화에 ‘기억’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었다. 그런 맥락에서 『플랫폼』을 돌아보며 마지막 인물로 대한민국 국민을 꼽을까 한다.

01.최승희: 최초의 한류, 혹은 문화적 연대

최승희의 타이완 공연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시공간적으로 멀고 오래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듯이 어색하다. 1995년 광복절 특집 드라마로 그의 삶이 조명된 적이 있지만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분단이라는 장벽은 월북 예술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적을 수밖에 없다.

「최승희와 타이완 - 전전(戰前) 타이완의 ‘조선’붐」(장원쉰, 통권 4호)은 최승희의 타이완 공연이라는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다소 담담하고 건조하게 사료들을 되짚어 간다. 최승희에 대한 현지인들의 환대와 타이완에 불어온 ‘조선 붐’은 지금 시대의 K-POP과 한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문화를 산업적 측면으로만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한 콘텐츠나 한류라는 개념으로는 식민지 시대 예술인의 절망과 고뇌를 이해하기 힘들며, 최승희의 타이완 방문이 단순히 흥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예술인들 간의 ‘연대’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 있다.

최승희의 타이완 방문에 대한 조명은 역사의 한 장면을 통해 문화적 교류가 단지 산업적 이익이나 문화적 점령이라는 자본주의적, 혹은 제국주의적 욕망의 발로가 아니라 문화적 소통과 정신적 연대일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준다.

02.진용: 우리는 무협을 즐긴다

좌백, 진산, 용대운. 이름만 봐도 어딘가 ‘무협스러운 이들은 90년대 한국의 신무협을 이끌었던 작가들이다. 80년대 무협의 안티테제로 등장한 이들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소 거칠더라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용의 전복’이라 할 수 있다. 진용은 단순히 무협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라기보다는, 비조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한국 문화의 해외 진출을 보여준다면 ‘무협의 재발견’ 특집(통권 9호)은 외래문화가 한국에 유입되어 혼종되고 착종되며 변모해온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그간 주류문화에서 배제되어 왔던 무협을 비평의 영역에 끌어들임으로써 하위문화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도 또한 의미가 있다. 무협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이 중국의 진용이다.

무협을 장르적,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다른 글들과 함께 수록된 「한국무협소설 vs 중국무협소설」(임춘성, 통권9호)는 특히 무협을 군담소설에서 발원한 한국적 장르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소개하고 동시에 이러한 주장의 한계를 언급함으로써 무협이라는 장르를 보다 역동적으로 제시한다.

03.조항리: 우리에겐 <태권V>가 있다

웹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에야 ‘만화’라는 것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만화는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불온하고 저급한 장르로 치부되었다. 애니메이션은 더욱 참혹했다. 기성 작가의 출판만화를 원작으로 한 몇몇 방송용 애니메이션과 완성도 낮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불모지였다. 비난과 조롱의 대상조차 되기 힘들었다. 특히 최초의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인 <블루시걸>(1994)과 100억 원이 넘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원더풀 데이즈>(2003)의 실패는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행히 연상호나 이대희 같은 역량 있는 작가들의 등장로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제작과 배급 시스템은 열악한 형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로보트 태권V>의 원작자 조항리 선생과의 인터뷰(통권15호)는 단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이 아니다. 그간 <로보트 태권V>는 김청기 감독으로만 기억되어 왔다. 그러나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나오기까지는 무수한 애니메이터와 스텝의 땀이 필요한 것이다. 만화계 원로 조항리 선생의 경험과 조언은 어려운 애니메이션 환경을 타개하고 새로운 비전을 엿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더구나 한국 최초의 만화로 알려진 이동영의 작품이 『대한민보』 1909년 5월 2일에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인 2009년 이루어진 인터뷰라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더욱 뜻 깊다.

04.오정희: 국제문화도시 인천의 정체성

인천을 말할 때 소설가 오정희를 빼놓을 수 없다. 인천에서 보낸 유년기를 바탕으로 한 단편「중국인 거리」는 성장기 소녀의 시선을 통해 전후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중국인과 일본인, 미군, 양갈보 등이 한데 어울려 살았던 혼란스럽고 디아스포라적인 인천의 한 단면을 그려내었다. 오정희 선생과의 인터뷰는 짧지만 선생의 기억 속 인천의 모습을 반추함으로써 인천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새삼 질문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인천은 뭔가 다른 공간이었어요. 전후의 폐허 위에 언제나 무언가를 짓고 있었지요. 늘 뭔가 끓이고 섞어서 벽에 칠하고 있는 중이었고, 미국인이니 중국인이니 외국인들이 어울려 있어서 지금 생각하면 ‘국제도시’였던 거예요. 일본식, 중국식 집들도 많았죠. 지금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독특했어요”(통권18호)라는 증언은 국제도시로서의 인천의 역동성을 잘 보여주며 그 기원을 짐작케 한다.

05.벤야민/뒤샹: 뉴미디어에 대한 재인식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지속적이고 급격한 혁신이 커뮤니케이션 중개자로서 미디어의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예술환경과 예술 창작의 방법도 다각화되어가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창작을 작가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는 용어는 1995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린 디지털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에서 유래했다. 이 페스티벌의 구호는 ‘누구나 작가가 되는 세상’이었다. 디지털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고 보편화된 지금이야 일면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의 저급한 기술 수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뒤샹과 벤야민 그리고 소셜 미디어」(김용섭, 통권22호)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뒤샹과 벤야민을 언급하며 누구나 작가가 되는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디지털 변화와 매체의 전환을 얘기하기에 뒤샹과 벤야민은 너무 낡은 인물들인지 모른다. 뒤샹은 변기를 전시함으로써 누구나 원하면 미술을 할 수 있음을 일깨웠다. 벤야민은 아우라가 사라진 대중예술의 시대를 예견했다.

누구나 작가가 되고 재미삼아 사이버 상에 올린 패러디와 ‘짤방’이,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의 글들이 작품이 되는 대중예술의 시대에 문화비평의 역할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한다.

06.대한민국 국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통권 1호가 나온 2007년부터 2014년 50호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과 인물과 현상이 다뤄졌지만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환경 속에서도 산업화를 이뤄내고 문화적 풍요와 성숙을 일구어냈기 때문이다. 통권 50호에 이르는 『플랫폼』의 수다한 글들은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찬사이자 반성적 비평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통권 46호 커버스토리)와 ‘애도’(통권 48호 커버스토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우리들 자신의 현주소에 대한 점검이자 뼈저리고 통렬한 반성과 자책에 다름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라는 인재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생자들에게는 비극이었으며, 남은 자들에게는 상처였다. 세월호 희생자 앞에서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읊조렸다. 그것은 조문이자 다짐이었다. 그리고 하나의 화두이다. 잊지 않음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시선의 끊을 놓지 않는 것이기에. 이때 기억은 변화와 변혁에 대한 열망이며, 그 시선의 끝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