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천재와 광기
백수향
10년 전 연극의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다. 무대 위에는 딸과 아빠. 장소는 가정집의 테라스였고, 극 중의 시절은 겨울, 딸이 막 대학에 들어가 자신의 천재를 펼치려던 즈음이었다. 추운 한밤중에 얇은 잠옷을 입은 남자가 덜덜 떨고 있다. 어쩌면 눈이 내렸을 테고, 조명이 그 남자를, 더 정확히는 남자의 정신을 갉아먹던 광기를 비추고 있었을 것이다. 천재였던 아빠는 하루하루 미쳐가고 있었으며, 역시 천재였던 딸은 아빠 곁에 남아 그를 지탱하느라 하루하루 사그라지고 있었다. 남자의 발작적 떨림, 이어서 대사. 보다 못한 딸이 “아빠,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하면, 아빠는 여전히 오들오들 떨면서 아마 이렇게 말했겠다.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어, 얘야, 여기, 내가 증명한 것을, 읽어보렴.” 가장 우아한 수학식이 있어야 할 자리엔 광인이 끼적인 두서없는 낙서들만 있고, 무대 위에는 그것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딸과, 아빠.

연극 <프루프>(2005년, 김광보 연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의 저 순간에 느꼈던 슬픔을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단지 한 위대한 인간의 무너짐 때문만이라고는 해명되지 못할 그 먹먹함이라니, 나는 천재의 광기 속에서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할 일종의 ‘숙명’ 같은 것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 무대는 언제나 이 둘을 연결하기를 좋아했다. <고곤의 선물>과 <프랑켄슈타인>부터 존 내쉬, 고흐, 이상(李箱), 까미유 끌로델, 모차르트까지, 온전한 허구든 현실에 기대든, 극은 천부적인 재능이 정신착란을 동반한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이 마치 ‘필연인 양’ 일관되게 그려내곤 했다. 정말 천재는 본래적으로 능력과 병증을 동시에 선물 받은 유형의 인간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대체 왜 이러한 천재의 이미지가 생겨난 것일까. 이 지점에서, (비록 예술의 영역에 한정지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천재에 관한 어느 미학자의 분석을 빌려보는 것이 좋겠다.

피터 키비는 『천재: 사로잡힌 자, 사로잡은 자』에서 천재를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편의상 하나를 사로잡힌 자, 다른 하나를 사로잡은 자라고 하자. 이 중 우리에게 일단 필요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에 자신의 기원을 두고 있는 전자의 유형이다. 플라톤에게 시인은 광인에 가까웠다. 그에 따르면, 시를 지을 때 시인은 제정신을 잃은 채 자기 안에 들어온 신이 불러주는 말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태에 대해 몹시 비판적이었지만, 근대 들어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적 사유를 자신의 방식으로 변형하고 격상시킨다. 그에게 있어 천재가 제정신을 잃는 것은 그 자체로 천부적 재능이었다. 천재는 삶의 의지에 속박된 범인들의 시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제 자아를 잃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는 세계를 온전하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일상 영역에서 실패하지만, 바로 그 실패로 인해 예술의 영역에서 축복받는다. 천재는 곧, 위대한 광인이다.
그것이 신이든 자연이든 사랑하는 연인이든, 무엇엔가 순간 ‘사로잡혀서’ 정신을 놓고 한달음에 작품을 써내려가는 이러한 천재의 모습은, 아마도 천재와 광기에 관한 가장 통념적인 이미지일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무대 위에서, 특히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흔히 보아왔던 장면은, 광기가 천재를 돕는 경우가 아니라, 광기가 천재를 덮치고 그의 총명함을 말려버리는 경우가 아니었던가.1) 그러니 우리는 플라톤이나 쇼펜하우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저 광증을 바라봐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천재의 고립됨에 초점 맞춰보면 어떨까. 이 경우 천재는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재능’의 동의어가 된다. 천재의 언어는 종종 우리의 것과 다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재의 천부적 능력이 어떻게 획득되었는지, 그것의 결과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천재는 동시대인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고립자이다. 천재가 광인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타인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천재가 광기를 얻는다면 그것의 원인은 그들의 외로움 때문이다.
그런데 외로움 때문이라면,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타인과 연결되지 못하는 외로움 때문이라면, 천재의 광기는 기실 너무나도 ‘평범한’ 인간의 감정에서 배태된 것이 아닌가. 결국, 천재의 광기 속에 숙명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통불능의 고통이라는 인간 본연의 숙명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무대가 천재의 광기를 즐겨 올리는 것은, 그 광기가 ‘각자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우리의 모습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 천재가 위로받는 순간,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 겹쳐질 수 있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다시 <프루프>로 돌아가 보자. 미쳐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아빠는 딸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얘야, 날 떠나지 마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타자로의 애타는 갈구. 딸은 그로부터 수년 동안, 임종의 순간까지 아빠의 곁을 지킨다. 그녀는 고립됐고, 그녀가 써내려간 수학식은 누구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서랍에 갇힌다. 그리고 저 연극의 주된 얼개는 그녀가 타인들과 가까스로 연결되려하는 그 조심스럽고 민감한 움직임을 다룬다. 극의 긴장은 그녀가 쓴 수학식의 진위여부를 둔 공방에서 최고조에 달하지만, 결국 연극이 ‘증명(proof)’하려 했던 것은 한 천재의 재능이 아니라, 그렇게나 다른 우리가 결국엔 소통할 수 있고 소통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아니었겠는가.

따라서 오늘날 구설에 오른 한 ‘천재’에 대한 안타까움과 실망감은, 그의 재능 자체에 대한 평가를 일단 차치하고, 그가 어떤 학문적 동료와도 제대로 된 소통을 해본 적이 없다는 데서 (어쩌면 소통의 의지조차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러 학자들은 천재의 개념이 너무나도 주관적이라며 ‘천재인지, 천재가 아닌지’ 결정하는 일의 어려움을 종종 호소하곤 하지만, 모든 모호한 것을 쳐낸 자리에도 그들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만은 남을 것이다. 그러하니, 역사 속 많은 천재들이 직면했고 도전했으며 심지어 거기 깔려버리기도 했던 벽은, 누구보다 빠르게 학위를 따고 성과를 내야 된다는 초조함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것. 그 벽은 필시 더욱 인간적인 열망, 고립무원 바깥으로 손 뻗으려는 열망이었다.
1) 누군가는 피터 키비의 천재 유형 중 아직 설명되지 않은 쪽―사로잡은 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낼지도 모르겠다. 본문에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결국 연극 <프루프>의 천재들은 이쪽에 가깝다. 이 유형의 천재는, 정신의 고매함과 주체적 능력을 가진 자로, 번뜩이는 순간의 영감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통해 꾸준히 행위한다. 그들에게 광기는 자신들의 능력을 가리는 치명적 불운이다.
#저자 약력
공연비평가. 2012년 제5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공연 부문 수상 loveake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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