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허구 사이를 떠도는 진실 : <연평해전>과 <소수의견>
이대연
지난해 비슷한 시기 개봉하여 전혀 다른 길을 간 두 영화가 있다. 한 영화는 관객 수 600만 명으로 손익분기점 240만 명의 2.5배나 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다른 한편은 관객 수 38만 명으로 손익분기점 120만 명의 30% 선에 그쳤다. <연평해전>과 <소수의견>의 얘기다. 많은 이들이 두 영화의 맞대결을 기대한 것에 비해 허무한 결과였다. ‘맞대결’을 기대한 이유는 영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각각의 영화를 보수와 진보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연평해전>이 국가주의 애국 마케팅으로 관객들에게 호소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소수의견>이 보수적 권력의 행태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잣대로 양단하여 판단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고유한 장르적 가치를 지닌 예술, 산업 분야로서 영화가 이와 같은 정치적 이념논쟁에 소비되는 행태는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를 함께 놓고 살펴보려는 것은 <연평해전>과 <소수의견>이 보여주는 상이한 태도 때문이다. <연평해전>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을 강조하는 반면, <소수의견>은 특정 사건과 무관함을 주장한다. <연평해전>은 사실성을, <소수의견>은 허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영화의 마케팅 포인트였다. <연평해전>에서의 ‘실화’는 물론 제3 연평해전이다. 그리고 <소수의견>이 말하는 특정사건은 용산참사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연평해전>과 <소수의견> 모두 ‘영화’이며, 영화는 허구의 예술이라는 점이다. 허구란 상징이나 알레고리 같은 기법을 통해 세계를 보편적으로 해석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시키고 질서화 하는 예술적 창작 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화’를 둘러싸고 두 영화가 보여주는 이런 상반된 태도는 어떤 불안감을 유발한다.
01.허구의 거부: <연평해전>
<연평해전>의 오프닝 자막은 이렇다.
이 영화는 2002년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을 이루어낼 당시, 서해 연평도 북방한계선에서 북한 경비정에 맞서 싸운 해군 제2함대 소속 참수리 357호 대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한 것입니다.
실화영화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말한다. 그렇지만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각색 과정을 거친다. 실제 사건을 영화로 만들 때 거기에는 ‘옮기는 자의 주관’이 들어간다.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되돌아봄과 동시에 그 사건을 현재에 다시 소환하는 이유로서의 현재적 시선이 개입한다. 그런 까닭에 실화 영화는 감독의 재해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연평해전을 연출한 김학순 감독의 말은 묘한 느낌을 준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정치적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보는 사람의 해석이다. 누구나 정치적으로 해석할 자유가 있다. 나는 그저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의 말은 자신은 사실을 보여줬을 뿐이고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연평해전>이 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현지 언론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는 내러티브와 캐릭터 모두 부족하며 군사적 광신에 젖은 호전적 해전 영화라고 원색적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LA Times>는 국가적 추모식에 참석한 느낌이라고 조롱한다. 또한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은 자막으로 잠깐 설명할 뿐이라며, 남북이 대치한 한반도이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을 리 없는 외국인들로서는 NLL이나 갑작스런 교전이 당혹스럽다고 토로한다. NLL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조차 제대로 모르니 외국인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현지 관객 중 대부분이 교민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부정적 반응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 언론의 평가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유추해 볼 수 있다. <연평해전>의 영화적 완성도는 높지 않으며,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도 주된 타겟 관객은 한국인이었으리라.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한국 관객들이라 해도 NLL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는 오프닝 자막으로 설명한다.
1953년 당시 유엔군은 압록강 바로 밑까지 모든 섬을 점령하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관은 휴전과 함께 해상 NLL을 설정하면서 NLL이북에 있는 모든 도서를 중국과 북한에 양도했다. 북한은 유엔군 점령 하에 있던 서해상의 섬들을 다시 차지하면서 NLL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두산백과사전」을 비롯해 관련 정보에 따르면 휴전 당시에는 NLL이 설정되지 않았으며, 북측에 통보된 사실도 없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실효적 경계라는 점 외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것이 김학순 감독이 말하는 ‘사실’일까? 그는 ‘사실’, ‘객관’, ‘진실’,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영화는 사실의 기록인가?
영화는 허구의 예술이다. 그것이 실화라 하여도 각색의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와 감독의 재해석에 따른 허구가 개입한다. 따라서 기본적인 골격을 이루는 사실들만 남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엄정한 사실이라고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전제로부터, 그것도 여타의 설명 없이 몇 줄의 자막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곧 기록영상이다.
극영화에 삽입된 기록영상은 다큐멘터리와 같은 효과를 낸다.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며, 영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강화하는 유용한 스킬이다. <연평해전>에서 이런 기록영상은 월드컵 장면, 영결식, 당시 정부 관련 뉴스, 장병 인터뷰 등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실제와 현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성이 작가의 주관적 선택에 의해 달라지기도 한다. 현실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현실의 묘사는 작가의 주관적 의도와 선택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다큐멘터리라 하여도 이처럼 모순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단순한 사실의 포착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진실’을 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월드컵 응원 장면은 관객들의 죄의식을 부추기고, 영결식 장면은 슬픔의 정서를 극대화시키며, 대통령 관련 뉴스는-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사실과 무관하게 이념적으로 예민한 위치에 놓여 있으므로-당시 정부와 그 자장 아래 있는 정치적 이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할 뿐이다. 그런 후에 쿠키영상으로 이어지는 장병들과의 인터뷰는 애잔하다. 엄밀하게 이 기록영상들은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정념을 강화할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평해전>은 (추측컨대) 내수용 영화다. 보편적 휴머니즘을 말하기에는 내러티브의 설득력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그런가 하면 당시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의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이 허구적 이야기를 통과해 영화적 진실, 삶의 진실로 나아가야 하는데 <연평해전>은 사실성을 강조함으로써 진실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무수한 해석과 정서적 강요가 영화를 구성한다. 그러니 질문할 수밖에. 사실 아닌 (혹은 아닐 수도 있는) 사실을 강조하며 영화의 허구성을 희석시켜 얻고자 한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실제적 현실을 묘사한 (그러나 파편적인) 기록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02.사실의 거부: <소수의견>
<소수의견>의 오프닝 자막은 또 이렇다.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자막은 무고한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거나, 세속적으로 해석하면 소송과 같은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가 실화가 아니라고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 ‘실화’라는 것은 실제 사건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관객들이 등장인물에게 쉽게 이입되도록 하기 때문에 몰입도를 높여 영화적 흥미를 유발한다. 따라서 영화 홍보를 위해 중요한 요소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면 숨길 이유가 없다. 반대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경우가 아니라면, 애초에 실화와의 관련성에 대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소수의견>의 이런 이율배반적 태도는 무엇일까?
소수의견은 손아람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후반작업을 마친 이후에도 개봉을 하지 못해 배급을 맡은 CJ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게 했다. 이유야 어쨌건 결국 CJ는 배급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개봉을 하면서 원작자를 비롯해 <소수의견> 제작팀은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스페셜 영화 소수의견’, ‘그것은 알기 싫다 133b: 소수의견’ 등의 팟캐스트에 출연하는가 하면 여타 인터뷰에서 영화가 용산참사와 무관함을 반복해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어쩔 수 없이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된다. 영화의 부분이 실제 사건과 꼭 맞아떨어져서가 아니라 철거시위 현장에서의 비극적이고 아이러니한 사건의 발생이 우리 기억의 목록에서 해당 사건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런데 굳이 ‘용산참사와 관련이 없다’고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막과 더불어 재차 강조되는 발언은 역설적으로 보다 분명하게 용산참사를 지시하는 듯하다.

엄밀하게 <소수의견>와 용산참사의 일치점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누가 봐도 특정 사건을 떠올린다면 실화라고 추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는 될 것이다. 게다가 원작인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 말미 작가의 말에는 그 ‘특정사건’이 언급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실화가 아니라고 밝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견>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 실화가 아니라고 자막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힌트를 동명 소설 말미에 있는 이정현의 해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수의견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 현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 소수의견에서 그려지는 ‘정의의 승리’는 작가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법정드라마로 전락할 위험을 지녔던 이 소설은 현실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소설의 배경이 용산이 아닌 이유는 여기서 드러난다. 용산에서 진실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손아람의 소수의견은 법정이라는 무대를 이용하여 용산에서 벌어진 폭력과 은폐를 조롱하는 훌륭한 풍자극이다. (이정현,「지옥을 완성하는 것은 언제나 살아남은 자들이다」, 손아람, 소수의견, pp.506~507)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독자(관객)로 하여금 현실에 내재된 모순을 대면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모순은 단일한 사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총체적으로 직면한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과의 동일시로서 사실의 재현일 수 없다. 용산에서 진실이 없었다고 할 때, 진실은 실제 사실의 정확한 규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행된 국가적 폭력의 실체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그래서 규명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진실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적 의미로 다가온다. 사실의 정확한 규명을 위한 노력이 진실의 해명이자 정의의 실천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과 정의는 동일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것이 <소수의견>이 법정드라마라는 장르적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용산참사를 다룬 또 다른 영화 <두 개의 문>(2011)은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빌려 사실과 진실의 간극을 메우려 한다. 시위, 진압, 사망이라는 몇 가지 사실로는 설명되지 않는 당일의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한다. <두 개의 문>에서 진실의 추구는 영화 밖에 있다. 영화 텍스트에 담긴 내용은 그 결과물에 불과하다. 방점은 영화 제작의 주체에 찍히며, 그 과정 전체가 작품을 구성한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제작하는 영화적 행위가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과 맞물려 역사 속으로 삼투되는 것이다.

반면에 <소수의견>은 진실 추구 행위 자체를 내러티브에 포함시킨다. 재판 과정은 드라마와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수단이다. 동시에 법정은 인간 조건에 대한 은유이면서 인간의 갈등과 투쟁이 가장 간결하고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범죄자로 추정되는 개인의 결백을 입증함으로써 사법 체계의 문제를 묘사하기도 한다. <소수의견>은 살인 혐의로 기소된 박재현이라는 인물의 정당방위를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 진원이 철거시위 진압 도중 벌어진 살인사건의 내부로 파고드는 과정을 뒤쫓아 감으로써 용산참사라는 개별 사건에 포섭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법적 정의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결국 <소수의견>이 사실성보다 허구성에 중심을 두는 것은 용산참사라는 하나의 사건에 갇히지 않고 우리 사회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연평해전>은 영화의 허구성을 외면한 채 명확하지 않은 사실들을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적 가치 뒤에 사건의 실체를 은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가 하면 <소수의견>은 용산참사라는 구체적 사건에 얽매여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진실’에 대해 질문한다. 실화란 몇몇 사실의 포착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진실’을 향해야 한다. 몇 가지 사실들을 배열한다 하여 그것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에 근거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일 수는 없다. 사실은 공간적 상황과 시간적 맥락을 지닌다. 진실은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총체적 해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영화적 진실 또한 그럴 것이다.
#저자 약력
李大淵 1972년 수원 생. 2012 플랫폼 미디어 비평상, 2012 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박사과정) 수료.
dups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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