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비’ 앞에 붙은 ‘아름다운 독’이라는 문구 때문에 무슨 ‘경국지색’이나 ‘嘉妃’ 따위를 떠올려서는 안 된다. 가비는 커피. 개화기 때 커피의 영어 발음을 차용한 중국, 일본식 표기 ‘가비(加比)’를 그대로 한글로 쓴 것이다. 커피는 비슷한 발음으로 가배(  , 加  , 加排), 혹은 그 빛깔이 한약 같다 해서 양탕(洋湯)이라고도 불렀다.
영화는 바로 이 가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커피 유입과 시음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필경 만나게 되는 고종(高宗, 재위 1863~1907)과 아관파천, 정관헌(靜觀軒), 러시아어 역관 김홍륙(金鴻陸, ?~1898) 사건 등 커피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상상적으로 원용해서 스토리를 끌어 나가는 팩션 드라마이다. 물론 그 팩션은 대부분 작가, 연출자의 픽션으로 채워져 있어 역사적 팩트의 농도는 아주 엷다.

 1896년 고종^{박희순 분}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대한제국을 준비하던 혼돈의 시기, 러시아 대륙에서 커피와 금괴를 훔치다 러시아군에 쫓기게 된 일리치^{주진모 분}와 따냐^{김소연 분}는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 분}의 음모로 조선으로 오게 된다. 고종 곁에서 커피를 내리는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 그녀를 지키기 위해 사카모토란 이름으로 스파이가 된 일리치, 그들이 사다코로 인해 은밀한 고종 암살 작전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영화 <가비>의 기둥 줄거리이다.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 가운데 고종 독살 음모 사건의 주모자 김홍륙에 관한 기록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했다는 김탁환의 소설 『노서아 가비』(2009)가 영화의 원작으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고종 암살 작전과 주인공 따냐, 일리치, 사다코 간의 사랑과 갈등’이 영화 <가비>의 주 모티브라면, 이 모티브는 전혀 비사실적 상상물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다양한 역사 팩션을 발표해 온 김탁환은 이 작품으로 ‘우리나라 팩션 소설의 바리스타’라는 칭호를 들어도 좋을 듯하다.

 그렇더라도 영화는 소설만큼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 원작 소설은 역사를 적당히 조미료로 사용한 상상의 활극으로 무거운 고전이나 정통 문학에 손을 든 독자들이 그런 대로 킬링 타임의 재미 정도는 느낄 수 있는데, 영화 <가비>는 그렇지 못하다. 마치 옛날 ‘학생입장 가’ 등급의 애국 선전 멜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멜로라도 1960~70년대처럼 가슴을 쥐어짜는 눈물이 있고, 목숨과 바꿀 만한 열렬한 애정과 애욕의 갈등이라도 있다면 그런 대로 보아 줄 수도 있을 것을……. 가비의 소재적 의미 역시 그런 정도의 설정과 그 설정에 따라 연출되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가비를 마시며 하는 말은 먼지처럼 가볍다.”는 영화 속의 한 대사가 일깨우듯 <가비>는 역사의 해석에서도 연애의 음미에서도 아무런 방점을 찍지 못한 채 ‘가비’ 냄새처럼 가볍게 날려 흩어지고 말았다. 어색하고 요란하기만 한 전투 액션, 일본군의 잔인성 부각 등이 모두 지난날 한국 영화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그렇고 그런 ‘항일 애국 영화’ 수준일 뿐이며, “한 남자에게 가비는 사랑이고, 또 한 남자에게는 제국주의의 꿈”이라는 과장 역시도 거북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1943)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도 거슬리고, 특이한 소재에 버무려진 기발한 상상을 만나려던 기대는 ‘독(毒) 한 방울’ 없이 끝나는 식상한 멜로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오늘날 이 시대는 ‘뭘 먹어도 쓴 맛이 나는’ 시대. 그래서 쓰디쓴 “가비 맛을 본 뒤에야 비로소 뭐든 단맛”으로 느껴진다는 고종의 대사는 이 시대를 상징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바리스타가 첨단 유행 직업으로 떠오르고, 작년 한 해 에스프레소 3,700만 잔과 맞먹는 300t의 커피를 소비한 사실이 그 증거일 듯. 거기에 이 시대가 정통이나 전통에 대해서는 반드시 건드려 보고, 비꼬아 보고, 찔러 보고, 마침내는 물어뜯고, 찢고, 가르고, 부수어야 유쾌하게 직성이 풀리는 시대여서 이런 종류의 팩션 사극이 상영되는지 모른다.

 기록상 한국 최초의 커피 시음자이면서 또 그 향과 맛에 심취했었다는 비극의 주인공 고종.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치욕스럽다 해도 나는 살 것이다.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만들어 황제가 될 것이다.”라는 지극히 감상적이고 애국심 자극적인 대사가 관객들로 하여금 120여 년 전 구한말 풍운의 역사를 한 잔 ‘가비’ 향기 속에서나마 다시 떠올려 보게 했다면, 이 같은 시간 죽이기용 오락 영화가 주는 미덕도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다만 한 가지, 영화 외적인 문제! 여기 등장하는 배우들의 대사 중 명령어의 어미가 모두 ‘거라'로 획일되어 있다는 점. ‘먹거라’ ‘앉거라’ ‘서거라’ 하는 식이다. ‘거라 변칙 동사’를 그릇되게 쓰고 있는 딱한 대본 작가, 배우들 때문에, 이런 데서도 흠이 가고 있는 우리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