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5일, <보도의 날-2011 기억과 기록, 그리고 염원(報道の日-2011記憶と記?そして願い)>이라는 특집 방송이 오전 8시부터 밤 11시까지 TBS 채널에서 방송되었다. 지난 한 해 일본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과 이슈들을 돌아보는 이 방송 가운데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3.11 동일본(東日本)대지진을 기록한 다양한 영상들을 당시의 시간 경과에 맞춰 5시간 동안 방영한 “3.11 영상의 기록-그 날, 무엇이 일어났나(3.11映像の記??あの日、何があったのか)”라는 섹션이었다. 당시 도호쿠(東北)지방에 관한 다른 방송 촬영을 하고 있었기에 다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재해 현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카메라부터, 지진 당시 흔들리는 스튜디오 안에서 우왕좌왕하면서도 보도를 계속하는 아나운서들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카메라, 그리고 같은 날 회사, 집, 길에서 지진을 겪은 시민들이 핸드폰으로 기록한 영상까지. 시청으로 인해 정신/심리적인 스트레스 등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해당 경우 시청을 자제해달라는 자막이 흐를 만큼 이 날 방송은 당시의 상황을 날 것 그대로 되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지켜보고 기억한다는 것의 윤리적 의미
-이야기하라, 그리고 보고 듣고 기억하라
 어느덧 일 년 남짓 흘러버린 시간을 핑계로, 지난 해 3월 11일의 사건과 이후의 삶, 특히 원자력발전소와 방사능 물질에 관한 보도를 미디어에서 마주치는 것은 이처럼 특별한 날의 특별한 프로그램 이외에는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3월 11일의 경험은 우리의 삶과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흔들림이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출 줄 모르고 발생하는 크고 작은 지진처럼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11 동일본대지진’이라는 단발적 사건성을 강조한 호명 아래 그것의 연속적인 일상성은 이미 얼마간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이는 어쩌면 일본사회가 재해로 인한 상실을 빨리 잊고 이전의 일상을 회복해내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써왔는지를 드러내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설령 당시의 경험과 현재의 상흔에 대해 입을 연다고 해도, 대부분은 전쟁이라는 위기를 극복해낸 것처럼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감내하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는, 멸균 처리된(sanitized) 순종적인 의지와 노력에 관한 이야기만이 되풀이 되곤 한다.  하지만 관심과 발품을 조금만 팔아보면, 3월 11일과 그 이후의 시간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목소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한국에서도 부산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바 있는 소노 시온(園子?) 감독의 <히미즈(ヒミズ)>는 단연코 주목할 만하다. 『이나중 탁구부(稻中卓球部)』의 후루야 미노루(古谷?)가 2000년대 초반 발표한 만화 『히미즈』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원작 만화 속 어두운 현실과 청춘의 이야기에 3.11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를 덧칠해낸다. 거액의 빚을 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결국은 자신을 내팽개치고 사라지는 어머니에게 삶과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해온 주인공 스미다소메타니 쇼타(染谷?太) 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처럼 ‘하찮은 어른’이 되지는 않겠다는 의지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중학생 소년이다. 하지만 그의 평범하지 않음을 사랑하는 동급생 치자니카이도 후미(二階堂ふみ) 분를 제외하고는 그의 의지와 소망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현실은 그가 아버지에게 결국은 돌을 들게 하고, 아버지를 죽인 자신 또한 죽음을 향해 돌진하게 만들 뿐이다.
 강렬한 이미지와 광기 어린 인물들,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폭력과 독특한 대사의 힘을 빌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어쩐지 이제껏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억눌려온 이들에게 느끼는 그대로를 말하고 마음껏 절망하도록 허락함과 동시에, (극장 안에서) 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에 눈 돌리지 말고 보고 기억할 것을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긴 시퀀스로 등장하는 도호쿠지방의 폐허가 된 광경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 것을 항변하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 압도적인 규모에 현실성을 상실한 스펙터클로서의 재해 당시의 순간 혹은 일시적인 사고 현장이 아니라, 그것이 쓸고 지나간 이후에 남겨진 시간과 기억과 일상이 남아있는 폐허가 된 도호쿠지방을 길게 비추는 화면은 그간 눈 감고 외면해온 곳을 마주하고 기억하라는 처절한 요구이다. 주인공 스미다가, 그리고 그를 지탱해주는 치자가 각각의 부모에게 폭력을 당하는 순간 또한 3월 11일의 지진과 그 이후의 연속적인 지진을 경험해온 이라면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당시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거친 핸드 헬드로 촬영된 비디오와 현장음을 제거한 오디오를 통해 고통의 감각을 되살림으로 인해 당시를, 그리고 여전히 당시를 살고 있는 이들을 감각의 표면 위로 되살려 내어 마주하기를 종용하는 것이다.
 
3.11 이전과 이후, 단절 혹은 연속?
 소노 시온 감독은 3.11 이후의 일본사회에 대한 꽤나 쓸모 있는 문화기술지를 쓰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가는 현실의 삶, 그리고 그가 스치듯 만나는 인물들은 현재 일본사회의 다양한 (어두운) 얼굴을 드러내는 훌륭한 기호들이다. 하지만 이는 3.11 동일본대지진을 기점으로 새롭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스미다의 보트장 주변에서 파란 텐트를 세우고 살아가는 홈리스들은 지진과 쓰나미로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들을 상징하는 파란 텐트는 사실 버블경제의 몰락 이후 장기화된 경기 침체로 이른바 집을 잃고 많은 이들이 영위해온 길 위의 삶을 드러내는 일본사회의 익숙한 풍경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이후 자신의 삶을 덤으로 얻은 인생으로 정의하고 이른바 ‘사회악’을 처치하기 위해 나서는 주인공 스미다가 길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인물들, 사회적 연결 고리의 상실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불만으로 변형되어 서슴없이 무차별 살인을 실행하는 청년,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절규가 일본사회에 대한 저주로 이어지는 청년, 동거인에게 학대와 SM플레이를 강요당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상관하지 말라”는 여성, 원자력발전을 찬양하며 네오 나치를 숭배하는 네오민족주의자,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부모-사회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면서 그저 조용히 숨어 살기만을 바라는 주인공은 3.11 동일본대지진 이전부터 지속되어온-하지만 대지진 이후 그 고통이 심화된 것이 분명한-현대 일본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결국 3.11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사건은 일본사회를 단절적으로 변화 혹은 뒤틀어버린 것처럼 상상되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낳았다기보다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사회적 모순을 심화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도시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내부 식민지’적 위치의 도호쿠지방이 경험해온 빈곤한 삶의 조건, 그리고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로 인해 그것마저도 박탈당하여 일본사회 내부의 ‘난민’이 되어버린 이들의 삶은,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시간을 단지 일시적이고 단절적인 자연 재해의 파괴가 아닌 그 이전의 경험과 존재들의 연속성 상에서 사유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불가항력적인 자연 재해의 발생 이후 그것의 파괴력과 영향력은 해당 사회가 그 이전부터 공고하게 유지해온 사회적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따라서 재해가 일어난 후에도 가장 고통 받고 가장 큰 상실을 겪는 것은 재해 이전부터 가장 불안정한 현실을 살고 있던 이들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희망을, 미래와 일상을
다시 이야기해도 좋은 때일까
 스미다가 자수를 하고 그 이후의 삶을 상상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전부터 소망했던 평범한 일상을 상상하게 하고 그것이 복역을 마친 후에 가능함을 믿게 하는 치자의 설득과 사랑이다. 스미다는 꿈에서처럼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는 대신, “힘내!” 라고 외치면서 자수를 하기 위해 달려나간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이기에 꿈을 가져야 한다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힘을 내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이야기를 영화 초반에서는 “보통, 최고!”라고 외치며 거부했던 그들이,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이를 온몸으로 긍정하면서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주인공의 자살로 끝을 맺는 원작 만화와는 정 반대의 결말을 선택한 감독은 한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희망에 져버렸다”라고 밝혔다. “힘내”라는 말이 누구든 손쉽게 말할 수 있는 무책임한 말이기에 좋아하지 않았지만, 3.11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앞에 두고 희망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절망만으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없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를 감독은 “희망에 졌다”라고 설명하면서, 영화 속의 “힘내”는 "희망이다!"가 아닌, 자신에게 읊조리듯이 "어쩔 수 없지. 희망을 가질까"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영화 내내 궁지에 몰려온 주인공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에 얼마간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힘내!”라는 말을 선사한 영화의 결말에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는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섣불리 이야기하는 ‘힘내’라는 말은 이제껏, 그리고 앞으로도 되풀이될 현실과 고통을 여전히 은폐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았으며, 극장 안에서 일상에서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견뎌야 하며, 그들이 “힘내”라고 말했다고 해서, 내가 “힘내”라고 말을 건넨다고 해서 그들의 현실을 둘러싼 문제들이 실제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을 구원한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이 결국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마땅치 않다. 이미 곁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원하는 홈리스들의 존재는 그들이 함께한 미래의 상상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혹은 굳이 아이를 낳고 이른바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상상하기 이전에, 왜 이미 지금 여기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일상을 나누고 있는 주변인-홈리스들과의 연대와 공동체의 모습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하는 원망스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문득,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고통을, 심지어 고통으로 인한 죽음을 종용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 또한 지울 수 없다.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재물로 삼아 결국 바꾸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윤리라는 것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을 종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타인을 고통에 가두지 않고 동시에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은, 그들과 내가 이어져 있으며 우리의 고통이 다르지 않음을 기억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함께 견디며 살아내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일까. 우선은 보고 기억하고 잊지 않도록, 그리고 그 다음의 걸음으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