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뒤엉켜 있는 바로…세상이다.” 독립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공 종석의 비통한 독백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을 향한 단순 넋두리를 넘어선, 계층 간 이동이 사라져버린 이 사회에 대한 절망적 단언이라 할 수 있다. <돼지의 왕>은 기술적으로는 매끄럽지 못한 영화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스튜디오 지부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수려한 그림이 스크린을 채우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곳, 한국사회의 현실을 풍성한 메타포로 전하며 기술적 열악함을 뛰어넘는다. <돼지의 왕>은 2011년 한국영화계의 주요 수확으로 기억될 영화다.
사라진 사다리, 계층은 계급으로 영화는 두 남자의 대화와 회고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중학교 1학년 재학시절 같은 반 친구였던 종석과 경민은 15년 만에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된다.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난 경민은 아내를 충동적으로 살해한 뒤 경민과 만나게 됐고, 경민은 동거녀에게 폭력을 가한 뒤 약속 장소에 나온다. 두 사람은 오랜만의 해후를 다 만끽하기도 전에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폭력성의 근원을 찾아간다. 그들의 회상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는 중학시절의 모습은 복마전 같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다. 종석과 경민은 중학교 들어가면서 피지배계급으로 생활한다.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지배계급은 부유한 집안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잘 영글었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어도 경민은 대항 한번 제대로 못한다. 종석은 그들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했다가 더 큰 보복만 당한다. 학생회장과 규율부장 등 공식적인 직책과 위계질서를 통해 지배계급을 공고히 한 그들을 배겨날 수 없다. 유일하게 그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훈이 뿐이다. 종석과 경민은 훈이를 자신들의 리더로 모시며 반란을 꾀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정학과 퇴학이고 ‘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영화 속 대사는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계층이 계급으로 변질된 시대, 피지배자들의 패배감을 압축해 전한다.
우상으로도 열리지 않는 닫힌 사회 영화에서 훈은 자신들을 돼지라고 칭한다. 열심히 살을 찌우지만 결국 그 살을 남에게 바쳐야 하는 돼지의 운명과 자신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종석 일행의 리더인 훈은 그래서 돼지의 왕이란 호칭을 얻는데 그는 자포자기식 폭력 행사로 탈출구 잃은 세상에서 자신만의 출구를 열어보려 한다. “악당이 되는 것은 부족해. 괴물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읊조리는 훈을 통해 영화는 억압되고 변혁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사회구조가 어떤 식으로 광포한 폭력을 낳게 되는지를 명시한다. 영화는 단순히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그치지 않는다. 피지배계층이 자신들의 비루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우상을 내세우고 그 우상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삶이 어떻게 피폐화되는지를 정교하게 보여준다.
돼지의 왕인 훈을 중심으로 뭉쳤던 종석과 경민은 훈의 자살을 통해 자신들의 고단한 학교생활을 세상에 알리고, 피지배계급 탈출을 꾀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꿈과는 정반대다. 홀어머니를 위해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훈, 그런 훈을 종석이 학교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피지배계급 안에서 자기의 삶을 위해 벌어지는, 만인을 향한 만인의 철저한 투쟁은 그렇게 묘사된다. 종석은 자신들의 우상을 죽이면서까지 현실을 변화시키려 하지만 닫힌 사회는 꿈쩍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괴롭혔던 학생들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안기고 싶다는 훈의 의도는 도리어 종석 일행에게 향한다. 15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과거 후유증에 고통 받는 종석과 경민의 모습은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아스팔트보다 차가운 현실을 은유한다. 중학시절 종석은 말한다. “난 정말 바보였다. 왜 그 애들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도저히 낄 수 없는 집단에 대한 선망 그리고 좌절이 담긴 이 대사는 긴 울림을 전한다. 영화는 암담하고 우울한 이미지와 메시지로 가득하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현실이 그런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