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장면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갓을 쓴 채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멍석 위에서 기타를 치고 음산한 노래를 부른다. 이어 한적한 곳에서 밤낚시를 하는 한 사내오광록 분의 모습이 스크린을 채운다. 사내는 물고기 대신 정체불명의 여인이정현 분을 낚으면서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망자를 위한 굿이 이어지면서 이 영화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파란만장>은 흥미로운 영화다. 완성도도 높다. <올드보이>(2003)와 <박쥐>(2009) 등으로 대가의 반열에 올라선 박찬욱 감독과 그의 동생인 설치미술가 출신 박찬경 감독이 공동연출했다는 화제 이상을 뛰어넘는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무당과 망자의 관계 등을 물과 낚시 등 여러 상징을 통해 풀어낸다. 스릴러와 공포의 형식을 지니면서 한국의 샤머니즘을 유머러스하게 전달하는 점도 눈길을 잡는다. 상영시간은 33분에 불과한 단편영화지만 만만치 않은 공력이 엿보인다. 급작스레 상과 하를 뒤집는 카메라 움직임, 흑백화면과 거친 입자가 도드라지는 야간장면 등이 샤머니즘의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아이폰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최근 몇몇 유명감독들이 아이폰으로 단편영화를 만들고 이를 모아 상영하는 행사를 치렀지만 <파란만장>은 유난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세계적인 인물이 된 박찬욱 감독이 아이폰 촬영과 기존영화 촬영방법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제작비부터가 단편영화로서는 범상치 않은 규모다. 1억 5,000만 원으로 웬만한 장편 독립영화 저리가라 할 수준이다. 이동통신사 올레KT의 든든한 지원으로 만들어져서일까. <파란만장>은 영상촬영과 편집기능 등 아이폰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를 스크린에서 구현해낸다. 아이폰의 한계가 보이는 장면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긴 하지만 기존 HD카메라 등의 촬영결과와 근사치에 가까운 화질을 보여준다. 더불어 최근 이 영화는 2월 열린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도 진출했다.

영화 <파란만장> 포스터

<파란만장>에는 작고 가벼운 아이폰의 장점이 특히 돋보인다. 박찬경 감독은 “수중촬영을 간단히 해낼 수 있었고, 카메라를 여러 대 이용해 다양한 편집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찬욱 감독도 “촬영장소를 물색하러 다닐 때 스케치하듯 찍은 영상들, 정식촬영 스태프가 아닌 제작부원들이 각자의 아이폰으로 찍은 내용들도 영화에 사용했다”고 밝혔다. 박찬욱 감독은 “보통 영화현장 카메라는 부피와 거기에 매달린 숙련된 전문인력 때문에 하나의 권력이나 다름없는데 <파란만장> 촬영현장에서는 그런 권력이 완전히 분산되고 수평화 됐다”고 덧붙였다. 아이폰이 기존 영상문화에 어떤 지각변동을 불러올지를 암시하는 발언들이다.
아이폰 영화의 등장은 영상문화에 여러 가능성들을 열어놓고 있다. 아이폰으로 찍은 영상을 곧바로 편집하고 음악과 자막까지 삽입할 수 있는 간편한 어플리케이션이 불과 2,000원 가량에 팔리고 있다. 박찬욱 감독은 “컨버터(converter)를 이용해 여러 렌즈들을 얼마든지 아이폰에 장착할 수 있었다. 필름 비슷한 효과를 내는 어플리케이션도 있다”고 말했다. 비싼 카메라가 없어도 이야깃거리만 있으면 언제든 누구든 빠르게 영화제작을 할 수 있는 길이 넓어진 것이다.
아이폰 영화의 등장은 저가 DSLR의 보급과 사진 프로그램 포토샵 사용의 대중화가 초래한 결과와 비슷한 현상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사진기술에 힘입어 많은 국민이 ‘사진작가’가 됐듯 아이폰 영상기술로 숱한 ‘영화감독’이 등장할지 모른다. 박찬욱 감독은 “아이폰은 마니아들이 많으니 영상관련 장비나 어플리케이션 등이 더욱 활발히 개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 가난한 학생이나 감독지망생이 저희가 쓴 돈의 100분의 1로도 번듯한 단편을 찍을 수 있으리라 본다”고도 전망했다. 아이폰 발(發) 영상혁명과 충무로의 변혁은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