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화 만들기를 주제로 삼은 수많은 영화들의 목록을 알고 있다. 영화가 자본의 시스템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창작자에게 안겨주는 수많은 갈등과 고통의 이야기들. 대부분의 이런 영화들 안에서 감독들은 세상 혹은 시스템과 싸우는 투사가 아니라 산업과 예술 사이에서 칭얼거리는 나약한 창작자로 그려진다. 거기서 그들은 스스로를 대중, 산업, 동료 예술가들로부터 불공정한 대접을 받는 존재로 여기며, 지독한 콤플렉스와 끝없는 야심 사이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어쨌든 소심하지만 끈질긴 인정투쟁의 욕망은 이들을 감독으로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힘이자 한 편의 영화가 기어이 탄생하게 되는 근원이다. 이 궁상맞은 고난의 과정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자기반영적인 영화들은 우리가 영화라는 허구적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을 균열시키는 정치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영화에는 감독들의 지난한 자기연민 또한 작동하고 있는데 이런 두 가지 상이한 면모를 경험하는 것이 ‘영화에 대한 영화’를 보는 재미일 것이다.
신수원 감독의 <레인보우>도 일단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바탕이 된 영화다. 영화 리뷰를 하면서 감독의 개인사를 언급하는 건 대개의 경우 적절하지 못한 선택일 때가 많다. 하지만 <레인보우>가 지독히 자기반영적인 영화라는 사실에 양해를 구하고 말하자면-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이미 십대 아들을 둔 엄마였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어렵게 준비 중이던 몇 편의 영화가 연달아 엎어지면서 충무로 밖에서 영화를 만들 길을 모색하게 되고 그 결과물이 <레인보우>가 된 것이다. 그런데 <레인보우>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까 전전긍긍하는 감독 대신 제작자, 투자자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들에게도 구박 당하는, 언제나 주눅 든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만은 한 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평범하고 소탈하다. 그런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 점이 <레인보우>를 날카로운 자의식 덩어리 감독들이 등장하는 일련의 영화들과는 다른 색채의 영화로 만들어준다. 이 영화는 우리가 감독의 고생담을 보며 낄낄거리게 하는 것보다 공감대를 형성하여 연민하고 그것을 우리의 보편적인 삶으로 확장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지완박현영 분은 벌써 몇 번이나 시나리오 단계에서 작업이 엎어진, 엄밀히 말해 실패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감독이다. 아직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한 지완은 말하자면 스타배우도 자본도, 스탭들도 대중도 아닌 무(無)와의 막막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냉소적인 아들과 아내 때문에 극장에도 가기 싫어하는 남편이 있다. 가족들의 체념과 원망 속에서도 오직 시나리오 속의 세계만을 생각하는 그녀지만 회사는 사사건건 이야기가 상업적이지 않다며 퇴짜를 놓는다. 영화는 이 가여운 감독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현실적으로 터뜨리는 대신 사랑스러운 판타지로 (도망간다기보다는)끌어안기 위해 애를 쓴다. 이를테면 글이 써지지 않는 밤, 지완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의 깜박이는 검은 커서가 어느새 수백 마리의 개미떼로 형상화되거나, 지완에게 협조적이지 않던 남편이 어느 순간 댄스 파트너가 되어 아들의 기타연주에 맞추어 다정한 춤을 추는 식이다.

영화의 한장면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완의 이야기 자체보다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가 서로를 매만지며 보듬어 안는 지점들이다. 음악에 대한 무한한 꿈이 있지만 학교 밴드부 선배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그 꿈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조차 박탈당해 힘들어하는 아들의 현실은 엄마의 그것과 닮았다. 영화는 둘의 현실을 그저 나란히 병렬하거나 충돌시키는 것처럼 보여주다가 어느 순간 그 어긋나는 지점들을 폭발시켜 서로에게 숨통을 틔워주는데 거기서 신경질적인 아들과 고집 센 엄마의 꿈이 비로소 서로를 헤아리기 시작한다. 충무로 밖에서도 영화는 만들어지고 학교 운동장에서도 연주는 계속될 수 있다는 희망. <레인보우>는 우리 모두는 영원히 성장하는 존재이고 성장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영화(만들기)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마침내 웃으며 말하는 영화다.

영화 <레인보우> 포스터

이미지 제공_ 인디스토리
南多恩 1978년 서울생. 영화평론가. 최근 글로 「게이 청년들의 연애, 현실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북구의 풍경 위로 떨어진 흡혈귀의 붉은 눈물」 등. namoo197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