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기억만큼이나 불완전하다. 기억의 파편을 정교하게 맞춘다 한들 온전한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잊어버렸던 것들은 어느 날 문득 기억으로 재생되어 망각의 일시성마저 상기시킨다. 하물며 잊고 싶다는 욕망이 투영된 기억은 어떠한가?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자 했던 망각의 동기마저 기억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 과거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능력은 부정하고 싶은 것이 되고 만다.

전후 회복기로의 안착을 자축하며 패전의 상흔을 지워가던 1950년대 말의 일본, 여기 망각과 싸우는 두 여자가 있다. 한 여자는 중매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지방 근무지에서 그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서둘러 한 결혼이었던 탓에 남편에 관한 정보가 거의 전무했던 여자는 무작정 남편의 근무지인 가나자와(金澤)로 향해 남편의 자취를 더듬어간다. 남편의 부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라는 이름으로 묻혀있던 그의 행적과 마주하게 하는 기제가 된다. 그 과정에서 여자가 마주한 진실이란, 더 큰 망각의 심연에 자리한 사건의 원점이다.

또 다른 여자는 지역 유지의 아내이면서 일본의 첫 여성시장 후보를 후원하는 활동가이다. 화려한 외모와 언변까지 갖추었으나 패전 직후의 삶을 기억에 담고 있는 한 그녀의 완벽한 외면도 언제고 조각날 수 있는 유리막일 뿐이다. GHQ 연합군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점령시대에 미군을 상대로 매춘에 나섰던 판판걸(パンパンガ―ル)로서의 삶은 망각의 욕망을 자극하는 과거이자, 더 높은 상승을 부추기는 촉매로서 여자의 내면을 유령처럼 떠돈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한 남자와의 재회로 인해 망각이 다시 삶의 일부가 될 것을 두려워한 여자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기억을 제거하고 만다. 

한 남자의 실종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사건의 원점에 존재하는 사회적 비극을 발견해 나가는 영화 <제로 포커스Zero Focus>는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 온 이누도 잇신(犬童一心) 감독이 일본 추리문학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 1907~1992)의 원작 『제로의 초점(ゼロの焦点)』(1959)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마쓰모토 세이초 자신이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던 한편,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黑い霧)』(1960)나 『쇼와사 발굴(昭和史發掘)』(1964~1971) 같은 논픽션을 저술했던 일종의 ‘역사가’임을 감안할 때 이 영화에서 시간과 기억, 특히 망각에 관한 주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을 통해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는 한편, 한국전쟁(1950~1953)의 발발로 경제부흥의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제로의 초점』이 저술될 무렵의 일본사회는 이미 전후 성장의 안정세를 향유하고 있었다. 이는 패전 직후 일본 열도를 잠식했던 허탈감, 빈곤, 정치적 무력감과 대조되는 성장에 대한 희망과 정치적 보수화를 낳았을 뿐더러 전쟁은 점차 잊혀진 과거가 되었다. 그러나 마쓰모토 세이초는 시대의 보편적 분위기를 거슬러 이렇게 물었다. “전쟁은 정말로 잊혀졌는가?”

영화 <제로 포커스> 포스터

종전(終戰),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지만 이후의 삶은 여전히 전쟁이 남긴 포화와 정신적 상흔의 기반 위에서 축적되었다. 그리고 전후 10년, 전쟁의 비참함은 잊고 싶은 것이 되었고 성장은 그것을 잊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화된 계층의 일부는 여전히 허탈감과 빈곤, 무력감에 허덕여야 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보편적인 망각 속에 존재하는 균열로, 언제든 전쟁 혹은 전쟁 직후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촉매로 기능했다. ‘판판걸’과 ‘판판걸’로서의 삶을 부정하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성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영화에서 이는 ‘새로운 시대’로의 꿈을 외치는 사치코나카타니 미키(中谷美紀) 분의 연설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데, 원작 속의 문장 하나가 이에 대한 주석으로 적격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패전으로 말미암아 일본 여성들이 받았던 피해가 13년이나 지난 오늘, 조금도 그 상처 자국이 아물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또 다른 충격을 받고 또다시 그 낡은 상처에서 끔찍한 피가 새로이 솟아올랐다고나 할까?”       
  이누도 잇신 감독은 영화 앞뒤에 도쿄의 1950년대와 오늘날의 모습을 각각 배치하여 원작에 없던 새로운 시점을 추가했다. 바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점이다. 감독이 조망한 도시의 마천루는 전쟁이라는 기억이 스며들기엔 너무나도 무덤덤하다. 전후 10년, 망각은 욕망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 욕망조차 기억되지 않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쓰모토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은 정말로 잊혀졌는가?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었던 ‘판판걸’의 변칙적인 영어처럼 상흔은 미처 깨닫지 못한 곳에 여전히 부유하고 있다. 사람과 공간에 각인된 미세한 상흔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 양 집단기억에서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닌, 아물도록 보듬어야 할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