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국문화원 도서실에서 세계 SF영화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오럼 필름 백과사전: 과학소설The Aurum Film Encyclopedia: Science Fiction』(1984)을 발견하고 열심히 읽는데, 1960년대를 지나다가 작은 스틸사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공룡 모양의 괴수와 성냥갑 같은 탱크가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미 1950년대 장에서 일본의 <고지라> 시리즈를 거친 뒤라 그 작품도 당연히 일본 괴수영화의 하나이겠거니 하고 더 이상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영화 <대괴수 용가리>(1967)의 한 장면임을 깨달은 것은 그 책을 구입하여 다시 찬찬히 보고 나서다. 비록 그 책에서는 이 영화가 ‘일본 괴수 영화의 아류작’이며 특수 효과 역시 일본 <고지라> 팀이 와서 도와줬다고 설명해놓았지만, ‘한국 SF영화’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기만 하던 당시였으니 너무나 반가웠다. 이 영화가 어떻게 해외에 알려졌을지, 직접 볼 수는 없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 궁금증을 푼 것은 세월이 꽤 지나서 1997년의 일이다. 그 해에 한동안 캐나다 토론토에  머물 일이 있었는데, 어느 언더그라운드 비디오 숍에서 뜻밖에도 <대괴수 용가리>와 조우했다. 감격과 흥분에 휩싸여 처음 본 <대괴수 용가리>의 인상은 좀 당혹스러웠다. 영화 자체가 일본을 통해 북미에 수입된 때문인지 등장인물들은 죄다 일본식 이름이었고 그나마 영어로 더빙되어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스토리를 점점 따라가면서 이 작품이 제작 당시의 여건에 비추어 얼마나 획기적인 영상을 연출해냈는지 감탄하기 시작했다.

<대괴수 용가리>는 실로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 과학문화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 하다. 당대에 우리가 과학과 과학자를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였는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요즘의 휴대폰과 같은 최첨단 통신기기와 정체불명의 광선 무기가 등장하고 집에다 간이실험실을 갖춘 과학 영재가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여기다 과학적 추론을 통해 용가리의 퇴치법을 궁리해내는 과정이 그려지는 등 거칠지만 여러 면에서 과학적 디테일이나 이성적인 과학자상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박사 역을 맡은 젊은 이순재가 우주복을 입고 로켓에 타서 궤도로 오르는 시퀀스는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사상 가장 세련된, 어쩌면 유일한 우주선 발사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SF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광기 어린 과학자(mad scientist)’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한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용가리’라는 비현실적 대상을 최대한의 과학적 현실성으로 그리는 형용모순적 서사의 시도였던 셈이다.

사실 이 영화는 휴전선 부근에서 출몰한 괴수가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설정 때문에 반공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지적이 있다. 용가리의 최후를 연민어린 시선으로 연출한 점은 일본의 <고지라>와 유사하다는 평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스토리나 드라마의 완성도는 당대 한국영화 수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렇듯 훌륭한 SF영화의 요건, 즉 서사적 품격과 비주얼의 특수효과(SFX)가 조화를 이룬 수작으로 <대괴수 용가리>는 한국영화사에서 장르영화의 귀감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 점에서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1999)라는 거대한 오마주 프로젝트가 스토리의 격이 비주얼에 못 미쳐 실패작에 머무르고 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용가리>의 장면

외국에서는 비디오테이프는 물론이고 레이저디스크나 DVD로도 출시된 <대괴수 용가리>였지만, 정작 한국에는 원판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온전하게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 제1회 충무로영화제에서 드디어 짧은 편집판으로나마 영어 더빙이 아닌 우리말로 나오는 원작을 볼 수 있었다. 전설처럼 제목만 듣던 영화를 이국에서 처음 접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그리고 올해 영상자료원에서는 마침내 외국 자료를 입수해 온전한 35mm 필름으로 상영했다. 영어 더빙판인 것은 여전히 아쉽지만 편집판이 아닌 작품 전체를 한국에서 필름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만인가. 이제는 <투명인의 최후>(1960)처럼 아직도 필름이 발견되지 않은 다른 한국 SF영화들도 모습을 드러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