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눈이 내리는 마을에 금발의 창백한 소년 오스칼이 살고 있다.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하고 그 분노와 외로움을 고스란히 홀로 감내하는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의 옆집에 한 소녀가 이사를 왔다. 소년만큼 창백하고 검은 머리와 깊은 눈동자를 가진 소녀 이엘리는 말한다. “나는 네 친구가 될 수 없어.”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럽고 서글픈 소녀의 고백. 하지만 이 외로운 소년과 소녀가 은밀하게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서로의 세계로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녀는 불안하다. “내가 그냥 여자아이가 아니라도 날 좋아할 수 있니?” 이엘리는 소녀가 아닌지도 모른다. 마을에서는 어린 흡혈귀에게 희생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녀의 비밀을 알지 못한 채 피의 맹세를 하자는 소년을 슬픈 눈동자로 쳐다보던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피를 허겁지겁 들이마신다. 소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는다. “너는 뱀파이어니?”

오스칼과 이엘리의 완벽하게 대립되는 외모는 오히려 이 둘이 서로의 거울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조금은 진부한 도식이기는 하지만, 빛과 어둠, 하얀 눈과 붉은 피, 현실과 꿈, 삶과 죽음, 그리고 성장과 영원한 젊음.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받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어 안는 건 이들이 자신의 타자성을 끌어안는 행위이며, 결국 사랑의 다른 말이다. 영화는 그걸 예상치 못한 장면을 통해 거꾸로 말하고 있다. 오스칼은 어쩐 일인지 자신을 초대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이엘리의 질문에 답을 유보하고, 인간의 방에 들어온 이엘리는 온몸과 두 눈에서 기어이 붉은 눈물을 쏟아내고 만다. 거부당해 버려진 타자의 무시무시한 슬픔과 저항을 이토록 아프고 강렬하게 형상화한 영화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엘리는 피를 흘리는 두 눈으로 오스칼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한다. “내가 되어봐. 잠시만이라도.”

영화<렛미인>의 한 장면 

자신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영원한 열두 살’로 살아온 흡혈귀와 성장을 거듭하는 소년의 로맨스에는 비극이 예견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중반까지, 이엘리와 함께 살며 이엘리를 위해 사람들을 죽여 피를 구해오고 결국 자신 역시 이엘리를 위한 피가 되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그가 이엘리의 부모인지, 소아성애증자인지, 혹은 연인인지 영화 속에서 설명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오스칼의 미래를 연상시키는 슬픈 초상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연인을 돌보며 결국 그녀와 다른 시간을 살 수 밖에 없는, 마지막으로 연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늙은 피뿐인 평범한 남자의 운명은 결국 연인의 피를 마시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흡혈귀의 운명만큼이나 처연하다. <렛미인>은 흉악스럽고 요란한 어른 흡혈귀 영화가 범접할 수 없는 깊은 정서를 지닌 영화이며, 오스칼과 이엘리는 올해 그 어떤 연인들보다 성숙하고 경이로운 커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