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평소에 영화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어떤 영화를 꼭 볼 필요가 생기면 유행이 다 지난 후에 DVD를 빌려 보는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주류 영화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점에 대해 내가 너무 현실의 흐름에 대해 무감각한 것은 아닌지 반성도 하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극장에서 <황후화(皇后花)>(2007)라는 장이머우(張藝謀)의 영화를 보았다. 내가 그 영화를 본 이유는 중국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영화보다 중국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장이머우는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이니 명색이 중국을 공부하는 학인으로서 왠지 보아두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강박감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일전에 어떤 모임에 초대받아 중국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황후화>와 관련된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기억에도 희미하지만 십여 년 전에 중국에 있을 때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았다는 차오위(曹,1910~1996)의 <뇌우(雷雨)>(1934)를 영화화한 작품을 본 인연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아무튼 정말 오랜만에 극장에서 중국영화를 보았는데 화려한 색채를 구사하는 영상미학 대가의 영화답게 <황후화>는 강렬했다. 이런 자극이 강한 블록버스터는 역시 극장에서 보아야 하는구나, 극장으로 관객을 오게 하려면 자꾸 이런 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별 다른 여운은 없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영화를 ‘옛 복장 영화(古裝片)’라고 하는데 <영웅(英雄)>(2003), <무극(無極)>(2006), <야연 (夜宴)>(2006)등이 모두 이런 부류에 속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옛 복장이 눈길을 끌 뿐 그 속에 어떤 역사감도 없었다. 장이머우는 이 영화에 대해서 부권과 여권의 최고봉인 황제와 황후의 일장 대전을 통해 화려한 겉모습의 이면에 있는 사악함의 근원으로서의 권력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점이 잘 드러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주위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 영화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폭력을 바로 ‘중국의 위협’으로 느끼는 분도 있는 것 같다. 중국의 힘에 대한 은근한 과시가 아니냐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인 것 같다. 중국에서는 이 영화의 상업적인 성공을 두고 “중국인은 자학을 좋아하는 민족인가”, “스크린에 붉은 페인트를 들이부은 ‘페인트공’의 폭력영화가 아니냐”는 혹독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묵공>은 <황후화>의 과도한 자극을 씻어내기에 충분한 좋은 차 같은 영화였다. 전쟁을 다루었지만 폭력과 피를 절제한 격조있는 영화였기에 너무 빨리 개봉관에서 사라진 것이 아쉬운 성찰적인 영화였다. 홍콩에는 “인문적 영화는 장즈량(張之亮), 무협은 쉬커(徐克)”라는 뜻의 ‘문장무서(文張武徐)’라는 말이 있다는데 과연 장즈량의 영화에는 인문적 기풍이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묵자사상(墨子思想)을 다루었다는 점이 반가웠다. 묵자사상은 한때 유묵(儒墨)이라고 병칭될 정도로 세력을 떨친 적도 있었지만 한(漢) 제국의 유교체제의 성립과 함께 중국사상사에서 자취를 감춘 잊혀진 사상이었다. 공자의 첫 번째 반대자였던 묵자의 주된 사상은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이므로. 겸애는 종족 내의 사랑을 강조한 유가의 사랑을 차별적 사랑(別愛)으로 비판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어 사랑의 대상을 넓히라는 뜻이고, 비공은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공격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묵자는 성을 방어하는 기술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는 묵수(墨守)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영화는 묵가사상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겸애와 비공이 갖는 딜레마를 그리고 있었다. 묵자인 혁리(류더화(劉德華) 분)는 겸애를 주장하지만 정작 사랑스런 일열(판빙빙(范氷氷) 분)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공을 주장하면서도 도리어 영화 제목처럼 조나라 군대에 점령된 양성을 구하기 위해 공격을 펼친다. ‘묵수(墨守)’가 아니라 ‘묵공(墨攻)’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은근히 사랑했던 일열을 물에 빠져 죽게 만든다. 이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그리고 고생은 혁리와 항엄중(안성기 분)을 비롯한 백성이 하고 승리의 미소는 엉뚱하게 탐욕스럽고 교활한 권력자 양왕이 짓고 있지 않던가. 결국 그도 얼마 가지 않아 망했지만 말이다.

중국철학사에서 잊혀진 묵자사상을 소설로 부활시킨 일본의 소설가 사케미 겐이치(酒見賢一), 그리고 그것을 만화화한 모리 히데키(森秀樹), 그것을 10년 전에 읽고 영화화를 결심한 홍콩 감독 장즈량, 그리고 영화에 출연한 한국, 중국, 홍콩, 타이완의 배우들, 그리고 음악을 담당한 카와이 켄지(川井憲次), 이들 모두가 합심해 동아시아를 실감할 수 있는 반전평화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나는 영화를 보고 루쉰의 『고사신편(故事新編)』(1936)의 「비공(非攻)」을 다시 꺼내 읽었다. 묵자는 송나라를 치려는 초나라를 제지하는 커다란 공적을 이루었지만,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히려 국경수비대에게 몸수색을 당하는 등 낭패스런 일을 당한다. 민중을 위해 목숨 바쳤던 모든 사람들의 역사적 운명을 암시하는 비애 어린 결말이다. 그런데 혁리는 전쟁고아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