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입시에서 해방되어 대학 새내기가 된 나는 새로운 문화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 위에 기침을 하’거나 ‘낙엽을 태우면서’ 길러오던 교과서적 감수성이 갑자기 ‘햄버거에 관한 명상’을 하도록 요구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거의 시대적 대세였다. 따라서 모더니즘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로 순식간에 진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젊은 나이 좋다는 게 뭔가. 당시 각광받기 시작하던 PC통신과 삐삐라는 이름의 호출기와 마찬가지로, 그 낯설기만 한 문학관은 점차 익숙하게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대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로 출발해서 새로운 감수성에 방아쇠가 당겨진 사람들은 참으로 부지런히 다른 일본 작가들의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무라카미 류우(村上龍),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그리고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가 그들이다.

  십여 년 전 문학 코드가 여전히 유효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예컨대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은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예전보다 바나나의 작품들이 더 대중적, 상업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바나나의 팬들은 소설 속에 보이는 따뜻한 감수성, 일상을 묘사하는 섬세한 시선, 사랑과 죽음 그리고 절망스러운 상처와 치유조차 담담히 풀어내면서 무거운 소재를 우화적으로 그려내는 몽환적 문체에 열광한다. 이러한 대중적 지지와 담백한 서술 행간에 드러나는 이미지 특성을 기반으로 바나나의 작품 『키친』, 『티티새』,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중 <아르헨티나 할머니>만이 유일하게 국내에서 개봉되었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내러티브 구조는 단순한 편이다. 18세 미쓰코가 동시에 맞이한 일대 사건,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행방불명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랑하는 아내의 임종조차 지키지 않고 아버지가 도피해 들어간 곳이 다름 아닌 아르헨티나 빌딩, 즉 이방인이라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출신과 정체가 불분명한 괴짜 여인으로, 동네 한편에 있는 폐허 같은 건물인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고양이를 키우고(잡아먹는다는 소문도 있다) 탱고를 추며 혼자 살고 있는 인물이다. 편견으로 인해 이질적인 존재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류사에서 보편적인 일이다. 이 작품에서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로 대변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열과 개성의 추구가 한 평범한 마을의 정적인 질서에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위협으로 치부되어 배척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극적이지만 전형적인 제노포비아(Xenophobia)외국인 혐오증인 것이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녀에 대한 묘사는 명백히 앱젝트(Abject)신체로부터의 폐기물, 비천한 것를 상징한다. 숨이 막힐 듯한 냄새를 풍기는 너덜너덜하고 요란스런 차림(“그 옷에서 곰팡이와 태양과 먼지와 인간의 기름 냄새가 났다”), 고양이의 배설물과 오물, 악취로 뒤덮인 어지러운 집안, 숲과 같이 무질서한 정원 등. 타자인 그녀는 마법으로 미쓰코의 아버지를 붙잡은 위험한 존재, 괴물로 사람들에게 규정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바로 그 ‘정체성, 체계, 질서’를 위반함으로써 모든 경계들이 사라진 혼돈 속으로 자아를 복귀시키는 그녀를 찾아가, 우주와 시간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만다라티벳 승려들의 종교의식. 만들어지는 순간 해체됨를 만들어 상처받은 영혼을 자연적으로 치유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커뮤니티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앱젝트인 동시에, 잃어버린 모성과 여성성, 자연의 생명력, 우주의 신비를 꿰뚫는 현자로 대유된다.

  또한 그녀의 치유력은 비단 아버지에게만이 아니라 미쓰코와 마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점차 파급력을 넓혀 간다. 원작에는 없지만,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만든 꿀을 먹은 사람들이 홀린 듯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라세 할스트롬(Lasse Hallstrom)의 <초콜렛>(2000)에서 낯선 여인 비안느가 만든 초콜렛을 먹고 규범적인 인물들이 강렬한 정열에 빠져 사랑하고 화해하는 모습과 알폰소 아라우(Alfonso Arau)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릿>(1992)에서 티타가 만든 요리를 먹고 억눌러 왔던 성적 욕망을 분출시키는 헤르트루디스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이러한 장면들은 라틴아메리카 문학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 이런 환상적 장치는 대체로 영화에서만 나타나는데, 어머니의 돌고래 묘비를 바다 속에 수장시키며 부녀가 화해하는 장면은 원작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더 몽환적이며, 더 아름답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인터뷰 <B급 BANANA>(1)에서 밝혔듯, “망가진 가족이 재기능하기 시작하는 것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바람은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전작들이 십여 년 동안 꾸준히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빠르게 근대화하는 사회 속에서 붕괴된 가족의 가치, 철저히 혼자이므로 고독한 개인의 죽음, 낭만적이지 않은 사랑 등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무겁지 않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일본사회는 극도로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틀 속에 침잠해 있는 개인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그 실존적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물어볼 수도, 답해줄 수도 없는 질문들에 대해 작가는 괜찮다고 말하며, 개인주의의 극한에서 우회적으로 당신의 불안과 아픔이 당신만의 일이 아니라고 제시한다. 휴머니즘과 명백히 구분되는 이 언설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감성적이며 대단히 가볍다. 이러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시도가 사람들의 공통된 기억과 경험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무거운 주제를 굳이 무게잡고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대를 불러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소녀적 감수성과 문체로 사랑과 죽음, 극복 과정을 담아내는 것은 이전 작품들과 대동소이하지만,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특이한 점은 일상적 층위에서 치유법을 발견하던 과거와 달리 외부(제3세계)의 생명력을 문제해결의 촉매로 끌어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촉매는 매개할 뿐, 화학반응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녹아들지 못한 채 사라진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극도로 모던화된 일본사회의 간극을 낯선 여인 홀로 메울 수 있을까? 두 세계의 결합체를 내놓고 사라져 간 유리(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만다라의 중심에 봉헌되어, 인간이 가진 허망한 바람의 결정체인 유적이 된다.

  낯설음이 촉발시키는 혼란과 수용,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결국 낯선 이를 통해 삶과, 그리고 내면의 이방인과 조우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정체된 일본사회에서 위로받지도, 성장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불안을 외부의 마술적인 주술을 대입해 치유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주술은 어렵지만 의외로 특별하지 않았다. 포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긴 세월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존재와 시간의 흐름이 주관적인 아르헨티나 빌딩에 삶을 녹여내면서 미쓰코와 아버지는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 특별한 경험과 깨달음을 아버지는 만다라로 표현해냈고, 관객은 그 만다라의 중심에서 빛나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보며 삶의 오묘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