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의 이해』의 한 장으로 할애된 일본미술사를 읽다가 일본의 사례를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은 나라 전체가 미술관이며 박물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문화재를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일본 본토가 큰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문화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문화민족을 자처하면서도 그간 문화재의 보존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체계적인 자료보관소를 갖추지 못한 것을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 탓으로 돌리기는 쉽지만, 전쟁의 폐허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각국의 문화재들을 보면 결국 책임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무관심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영화의 경우에도, 필름에 섞여있는 소량의 은을 채취하기 위해 녹여버리거나, 한창 유행이던 밀짚모자의 테두리 장식을 위해 잘라 사용해버린 전력이 있다. 이런 연유로 불과 몇 십 년 전의 영화조차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게 상당수라는 것이다. 그나마 자료의 중요성을 깨닫고 근대문화의 한 축이었던 영화를 등록문화재로 삼게 된 것은 다행이다.

문화재청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 최고(最古) 영화 <미몽>을 비롯한 한국 근대영화 7편을 올 9월 문화재로 정식 등록했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된 작품은 식민지시대 신여성을 다룬 <미몽>(1936, 양주남), 광복 이후 첫 영화이면서 멜로액션드라마의 초기형태를 보여주는 <자유만세>(1946, 최인규), 유일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 윤대룡), 산사의 고요한 생활을 배경으로 모정에 대한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한 수작 <마음의 고향>(1949, 윤용규),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 금지처분을 받기도 한 휴머니즘영화의 모델 <피아골>(1955, 이강천), 각종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자유부인> (1956, 한형모), 최초의 해외영화제 수상작 <시집가는 날>(일명 <맹진사댁 경사>, 1956, 이병일) 등이다. 이 작품들은 제작된 지 50년이 넘은 것으로 예술적 완성도가 높고 당대 사회 모습을 반영해 자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는데, <마음의 고향>과 <자유만세>는 현재 한국영상자료원(KOFA) 사이트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고전영화VOD에 접속하면 누구나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윤용규(尹龍奎) 감독의 영화 <마음의 고향>(동서영화사, 1949)는 한국 극작가의 최고봉 중의 하나인 함세덕(咸世德, 1916~1950)의 「동승(童僧)」(1939)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는 점, 한국영화의 산증인인 최은희(崔銀姬)의 데뷔작이라는 점, 1950년 최초의 한불영화교류에 따라 프랑스에 출고되었다는 점, 국내에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영화제작자인 이강수씨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16mm필름을 기증받아 존재를 확인하고, 2005년 일본국립필름센터에서 35mm오리지널 네거티브필름이 발견되어 마스터프린트를 제작 입고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특별히 큰 관심을 끈다. “당시 영화계 사정이 그러했듯 필름 공급원이 일정치 않아 코닥, 후지, 아그파 등 쪼가리 네가티브필름을 모아 사용하다보니 화질이 고르지 않았다”는 평가도 재미있는데, 이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제1회 서울시 문화상 영화부문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작품성도 인정받았다(한국영화감독협회 기획, 『한국영화감독사전』 참조).

이 영화의 원작 희곡에 해당하는 함세덕의 「동승」은 연구자들과 연극인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수작이다. 희곡 「동승」은 1949년 「마음의 고향」으로 각색되어 영화로 제작되었고. 또한 2003년 주경중 감독이 <동승>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하여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원작이 훌륭하면, 리메이크 작품에는 어느 정도 프리미엄이 주어지는 법이다. 한국 영화의 발전을 위해서, 최근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문화콘텐츠 산업의 한 경향인 OSMU(One Source Multi Use)를 위해서도 ‘원작’의 우수성은 새삼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헐리우드 영화계가 자주 셰익스피어 원작을 각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거니와, 우리에게도 먼저 고전의 반열에 들 만한 ‘원작’을 찾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화산업 진흥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   

함세덕의 원작 희곡과 윤용규·주경중 감독의 영화를 비교해보는 일도 흥미롭다. 세 작품 사이의 상당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신파성을 배제하면서 모정에 대한 소년의 그리움을 담담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자리에서 세 작품의 차별성, 우월성을 논하기는 힘들다. 다만 1949년 <마음의 고향>이 함세덕의 원작 희곡이나 2003년의 <동승> 못지않은 품격과 강렬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마음의 고향>에서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선영(金善英)이 친어머니로, 이 작품으로 데뷔한 최은희가 아들을 잃고 대신 도념(도성)을 양자로 입적하려는 미망인으로 나온다. <마음의 고향>은 김선영과 최은희의 대결이자, 현실에서의 어머니와 상상에서의 어머니 사이의 대결이다. 이 대결은 두 배우의 과장된 연기나 격정으로 표면화되지 않고, 마치 조용히 타오르는 숯불과도 같이 내화하고 있다. 흑백화면으로 펼쳐지는 산사의 아름다운 풍광은 근대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옛날 옛적의 ‘마음의 고향’과 겹쳐진다.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격변기 와중에 제작된 작품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이 작품은 현실사회로부터 격절된, 그럼에도 우리의 삶임이 분명한 어떤 인정의 측면을 그려내고 있다. <자유만세>나 <사랑의 맹서>와 비교해가며, 당대의 연기술과 촬영술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법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경상북도 금천에 있는 충암사에서 절의 바깥 장면을, 고려대 뒷편에 있는 개운사에서 내부 장면을 각각 촬영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이강수는 원래 은행가로 영화 제작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세트 촬영보다 로케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고적한 산사의 모습이 근대화 이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로케 촬영이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느껴진다. 감독 윤용규는 1913년 대구에서 출생, 1939년 일본 동보영화사 연출부에 입사, 제1조감독을 지냈는데, 그의 영화계 스승은 일제 말기 군국주의 어용영화 <젊은 모습>(1943)을 만든 바 있는 토요타 시로오(豊田四郞, 1906~1977)였다. 윤용규는 해방 후에 영화동맹 서울지부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으며 6·25 직전에 월북한 뒤로는 행방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펴낸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는 한국영화의 실상을 알 수 있는 매우 값진 자료집이다. 자료집의 몇 부분을 읽다보니, 함세덕의 희곡 「해연」도 그 당시에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자료집에 실린 「조선영화의 발전」(<경향신문>, 1949. 1. 6.)은 평론가 이태우의 글인데, 영화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고 있어 잠깐 인용해본다.
미망인의 심리묘사도 부족하여 도성을 기여코 데리고 가겠다는 극적 필연성이 박약하며 크라이막스에 박력이 결여된 것이 ‘옥의 티’다. 절 안의 승려 생활 내용과 동승의 좀더 ‘리얼’한 터치가 있었더라면 좋은 극적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도성이 종을 치고 쓰레질도 하고 걸레질도 하여 등피도 닦는 등 그 혹사되는 동승 생활 묘사에 있어서는 너무나 깨끗한 ‘앨범’이 되고 말았다. 이 묘사가 약했기 때문에 도성의 결심까지의 극적인 조건과 감정의 고조가 약했다고 본다. (…) 도성모역(김선영)의 연기는 우수하였다. 황선달역(최운봉), 주지역(남승민), 미망인모역(석금성) 등은 무난에 속하고 미망인역(최은희)는 연기력 부족이다.

지금의 영화적 감수성으로 보면, 대부분 최은희의 연기력을 인정하고, 나머지 배우들에게서는 신파적인 잔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것에도 감수성의 유행이 있는 법이고, 당시의 평론가 이태우의 눈에는 최은희의 연기가 생소하게 느껴졌을 가능성도 있다.
몇 년 전 필자는 함세덕의 희곡집 『동승』(1949)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책이었는데, 표지와 목차의 제목 ‘동승’ 아래에 소장자 친필로 ‘마음의 고향’이라는 부기가 달려 있었다. 아마도 소장자는 희곡 「동승」 못지않게 영화 <마음의 고향>을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