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롯뽄기(六本木)는 이태원처럼 외국인이 가장 많이 모이는 번화가이다. 그 뒷골목에 있는 시네마트 롯뽄기(シネマ-ト 六本木)에서 한류시네마페스티발이 열리고 있다. 이 영화관은 아시아 영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영화제와 더불어 ‘한국영화 오락강좌’라는 강좌도 열어 <한국 영화에 대해 알자>, <한국 배우의 얼굴에 다가가자>, <K-POP×K-MOVIE 가이드> 등을 개최하고 있다. 12년 전 일본에 왔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흐름이 한류 이후에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작년 드라마 <대장금> 이후 비슷한 포맷에 식상한 관객들이 한국 영상물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골든타임과 심야타임을 점유했던 한국 영상물이 서서히 심야와 케이블 텔레비전으로 밀려나고, 고공비행을 하던 한국어 수강생 수는 올해 처음으로 정체 혹은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다. 이런 한류의 거품이 사라지는 지금이 오히려 무척 중요한 시기이다. 이제 한류의 진짜 맛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하다.

기대를 갖고 찾아간 영화제는 각 주제에 맞추어 20편의 한국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관능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2006), 기상천외 <박수 칠 때 떠나라>(2005), 미학 <비열한 거리>(2006), 정의 <공공의 적２>(2005) 이외에도 죄, 불가사의, 유혹, 미궁, 환상, 아키바계, 폭소, 희망 등 다양한 주제의 영화가 상영되는 진수성찬의 영화제였다. 2005년 처음 개최할 때 한 번 하고 끝내겠지 싶었는데, 어느덧 제3회에 이르고 있으니 반갑기만 하다. 

‘아키바계’란 아키하바라계(秋葉原系)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첨단 유행을 찾아 아키하바라에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코스프레코스튬 플레이의 준말, 피겨 등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서브 컬쳐에 심취한 오타쿠(オタク)도 이에 해당된다. 이 아키바계 영화로 <다세포소녀>를 소개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스캔들>(2003)의 차기작으로 이재용 감독이 나름대로 실험을 했다고 한다. 인터넷 연재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다세포 소녀>의 배경은 교사와 학생이 자유롭게 성(性)을 즐기는 무(無)쓸모고등학교다. 영화는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을 즐기는 SM커플이 등장하는 등 시종 계몽적인 고정관념을 해체시킨다. 원조교제로 가족을 부양하는 주인공 가난소녀(김옥분 분)는 조직폭력배 두목에게 몸을 주기로 하고 모텔로 찾아갔다가 이성의 복장을 즐기는 크로스드레서(cross dresser) 왕칼언니(이원종 분)와 친구가 된다. 이후 가난소녀는 무쓸모고 지하조직인 ‘에로틱 랠름교’에 끌려가 춤을 추고, ‘흔들녀’라는 이름으로 일약 인터넷스타로 발돋움한다. 사실 이 영화를 볼 때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루했다. 장정일이나 마광수사건 이후 자유로운 성은 더이상 신기하지 않다. 칙칙하게 그려지는 성을 밝고 아름답게 드러내려 하는 의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예이츠 시집 위에 방귀를 뀌면서 우리 안의 허위의식을 깨려는 감독의 의도도 알겠다.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상투적이고 유치하기에 한국에서도 개봉 2주차에 사라져버린 영화였다. 몇몇 한국인 평론가들의 호평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다세포 소녀>를 ‘실험’ 혹은 ‘장르확장’으로 평가했다. 무엇이 실험이고, 무엇이 장르확장인가? 일본인들이 이 영화를 ‘아키바계’ 영화라고 소개했듯이, 이 영화는 일본풍 C급 넌센스영화와 닮아 있다. 키타노 타케시(北野武)가 만든 C급 넌센스영화 <모두들∼하고 있냐!(みんな∼やってるか！)>(1995)는 그래도 볼 만은 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일본인들은 시험을 끝낸 수험생마냥 조용히 나갔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을 보고 “스고이(멋있다)!”라고 떠들던, 혹은 <괴물>을 보고 “멧챠 오모시로이!(진짜 재밌다)”라고 왁자지껄 나가던 관객도 없었다. 1,800엔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롯뽄기를 얼마나 헤맸을까. 한류영화제라면 더욱 진지하게 영화를 선정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상예술이 좀더 방향성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소외를 만드는 한류가 아니었으면 한다. <다세포소녀>를 보면서, 나는 달동네 분들이 이 영화를 보면 기분이 어떠실까, 그야말로 착잡하고 화가 나기까지 했다. 한류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을수록, 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은 차별 위에 소외감마저 느끼고 있다. 한류가 소외된 마이너리티를 외면할 때, 몇몇 영화인들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2004년 영화 <피와 뼈>는 괴물 같은 사내 김준평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중심으로 재일조선인의 어두운 삶을 다루고 있다. 일본 영화계는 2005년 이 영화에 상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칸사이(西)지역 민족학교 학생들의 삶을 코믹하게 다룬 영화 <박치기>(2004)도 수작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2006)를 위해 김명준 감독은 3년 5개월 동안 홋카이도오(北海島) 조선초중고급학교의 교원, 학생들과 함께 살면서 차별 속에서도 당당히 민족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온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의 현재를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이런 영화들처럼 마이너리티 문제에 주목하는 영화가 한류를 통해 알려질 수는 없는 것일까? 진정 우리 영상물이 몇몇 영화배우를 알리는 일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소외된 마이너리티 문제를 지적하고 알리는 아시아문화 르네상스에 공헌하는 ‘희망의 한류’로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