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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도리화가>는 있어도, 소리 ‘도리화가’는 없구나!
통권 : 55 / 년월 : 2016년 1,2월 / 조회수 : 3424
-영화 <도리화가>(이종필 연출, 2015년 11월 25일 개봉)

영화 <도리화가>는 있어도, 소리 도리화가는 없구나!

-영화 <도리화가>(이종필 연출, 20151125일 개봉)

 

윤중강

 

<서편제>(1993)<휘모리>(1994),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다. 오정해와 김정민, 두 작품의 여주인공은 모두 판소리를 전공했다. 연기가 미흡했을지는 모르나, 감정이 이입되는 소리였다. 영화로 보나, 음악으로 보나, 가치가 있다. 서편제의 주인공 오정해는, 이 영화의 속편 격인 <천년학>(2007)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영화 <도리화가>(2015)는 어떤가? ‘배수지에 의한, 배수지를 위한, 배수지의영화다. 배수지가 참으로 예쁘다. 그런데 거기서 머문다. 소리가 참으로 아쉽다. 배수지는 이 영화를 위해 판소리를 얼마큼 배웠을까? 1년 혹은 3, 아니다. 배수지는 음악성이 있다. 그러나 투자한 시간이 적었다. 그녀가 실존하지 않는 소리꾼을 연기했다면 별반 상관없을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연기한 인물은 진채선이다. 실존인물이다. 판소리 최초의 여류 명창이다. 남성만이 가능했던 소리판에 뛰어들어서, 여성도 가능함을 보여준 인물이다.

 

판소리를 할 수 없던 시대에, 그녀가 여성으로서 판소리를 했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다. 소리로서 남성을 능가하거나, 남성과 다른 면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개인사(個人史)적인 면에서나, 시대사(時代史)적인 면에서, 설득력과 공감이 있었어야 했다. 배수지는 진채선이 되어야만 했다. 아쉽게도 진채선이 되지 못했다.

 

영화 <도리화가>, 영화 <서편제>를 오마주(hommage)한다.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은, 눈발이 날리는 장면이다. 눈 먼 송화가 동생과 소리로 해후(邂逅)한 후, 어린 소녀와 함께 어디론가 멀리 떠난다.

 

영화 <도리화가>의 첫 장면에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눈길을 걷고 있는 어린 소녀가 보인다. 어린 채선이다. 아이는 기생집의 몸종이 된다. 그녀는 우연히 듣게 된 판소리에 반한다. 판소리 <심청가>였다. 그녀는 왜 심청가에 반했을까? 심청이 바로 자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소리판이 끝났어도, 소녀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재효(유승룡)은 어린 채선에게 말한다. “마음껏 울어라. 울다가 보면 웃게 될 것이야. 그것이 판소리라는 것이지.”

 

이 영화의 시작은 이렇게 근사하다. “심청가 얘기가 꼭 제 얘기인 것 같아서 전 소리꾼이 되고 싶었습니다.” 채선은 그리 말한다. 판소리에 여성이 존재하는데, 왜 소리는 여성이 부르지 않는 것일까? 소녀는 자신도 소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아쉽다. ‘판소리와 여성을 연결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진채선과 소리를 연결하는 면에서도, 모두 피상적이다. 설명은 있으되, 공감이 아쉽다. 연기를 했으나, 몰입이 아쉽다.

 

이 영화는 소재는 확실하나, 주제가 모호하다. 진채선을 중심으로 여러 얘기를 만들어냈으나, 그건 판소리라는 장르, 소리를 하는 여성, 대원군 집권의 시대 사이에서, 삼위일체 되는 중심이 약하다. 그건 분명 진채선의, 진채선에 의한, 진채선을 위한영화로 집중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배수지의 소리를 떠나서도, 영화가 그리는 진채선 자체도 아쉽다.

 

이 영화는 신재효가 판소리를 가르치는 공간인 동리정사가 등장하고, 거기서 판소리 수업을 통해서 판소리론()을 알리려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화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한다. ‘영화적으로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도 그렇다.

 

진채선(배수지)과 신재효(유승룡), 영화에선 이 두 사람을 각각 물과 불로 상징하고 비유하려 한다. 영화는 진채선을 심청으로 보기를 요구한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채선이 소리한다. “만경창파 갈매기 격으로 떴다 물에가 (풍덩)” 영화에선 실제 채선이 물에 빠진다.

 

영화에는 이렇게 채선이 물에 빠지는 장면을 앞과 뒤에 병치시킨다. 기생집 몸종이 된 심청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장면이 있다. 소리를 하다가 비를 맞고 정신을 잃은 채선을, 장작불로 피워서 몸을 데워서 깨어나게도 한다. 모닥불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 진채선이 바라보는 스승 신재효를 의미 있게 보이게 하려 한다. 진채선은 물의 과잉이요, 신재효는 불의 과잉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물과 불로 병치시키면서, 각각 불과 물을 만나서 서로의 기운이 순화 및 성장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얼마나 영화적인가에는 의문이 생긴다. 아울러 이것을 음악적으로 받쳐주지 못했다. 연출에 의한 영화적 논리는 있으되, 관객이 실제 느끼는 영화적 감성에는 거리가 있다.

 

시대와의 연결고리도 그렇다. 영화는 진채선-신재효와의 관계에, 대원군(김남길)을 등장시킨다. 영화적인 삼각관계는 이제 만들어졌다. 여기에 시대를 이입하기 위해서 서학(기독교)을 집어넣는다. 구한말 혹은 대원군시대의 사회상을 그리려는 의도다. 여성으로서 소리를 하려는 진채선을 낙성연에 참가시켜달라고 청하는 신재효를 향하여, 대원군이 그를 서학과 연결해서 하옥하는 장면은 참으로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 생뚱맞다. 차라리 서학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면 어땠을까? 영화 <서편제>의 시대적 배경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 시대에 왜 소리꾼들이 저렇게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이 영화의 주제가 본질적으로 여성 소리꾼과 연관되는 것이고 보면, 거기에 충실하게 내용을 전개했어야 했다. 진채선을 연기한 배수지가 아름답게 보이기보다는, 소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받치려는 그녀가 아주 처절하게 보였어야 했다.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심청의 수난은 수난이요, 춘향의 고난은 고난인 것이나, 채선은 그것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과연 여성으로 소리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얼마만큼 자기주도적 노력을 했을까? 그것이 영화에선 어떻게 그려졌을까? 이 영화는 페미니즘 시각에서도 아주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에 인색하거나, 깊이 있게 파고들어갈 능력이 부족하다.

 

경복궁 낙성연에서 여성소리꾼인 진채선을 노래하게 해달라고 찾아간 신재효에게, 대원군의 대사는 참으로 황당하다. “거룩하네. 사랑, 평화, 평등, 뭐 그런 건가? 마치 천주학 교리 같구나. 자네가 예수고, 그 계집이 베드로인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면서이런 대사와 함께, 신재효를 하옥하게 된다.

 

신재효와 진채선의 관계를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로 얘기하는 설정은, 어안이 벙벙하다. 무리의 극치다. 비유컨대, 부실한 한식을 먹으라고 했다가, 이제 그 한식이 별반 대단치 않음을 알고, 이제 양식을 한번 먹으라고 권하는 곳과 다를 바 없다. 내 비유가 얼마큼 설득력이 있을지 모르고,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는 가혹할지 모르나, 내겐 정말 소화하기 힘든 장면이다. 설상가상, 영화는 여기에 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사자성어를 들먹인다. 대원군 자신과 신재효, 진채선의 입신양명에 관해서 얘기한다. 이 영화는 이렇게 많은 개념을 설멋지게버물리고 있다. 소리꾼에게 설멋지다는 표현은 과히 좋은 뜻이 아니다.

여기서 영화 <서편제>가 갖는 미덕 두 가지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서편제>의 판소리는 유비(類比)의 역할을 한다. 둘째, 영화를 통해 그 시대상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다.

 

<서편제>에서의 판소리 대목의 인용은, 주인공의 처한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영화 <도리화가>도 물론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서편제> 만큼 판소리를 깊게 다가오지 못한다. 판소리 대목의 설정 자체도 문제가 있다. 신재효가 부르는 <쑥대머리>가 그렇다. 이 배우의 가창력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춘향이 옥에서 부르는 <쑥대머리>, 채선을 그리워하는 신재효의 심정으로 이입할 수 있을까? 물론 신재효가 채선을 그리워하면서 만들었다는 <도리화가(桃李花歌)>가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영화 <도리화가>에서 진채선은 초반부에는 심청으로 보이게 하고, 중간의 <사랑가> 대목을 부르는 장면부터는 그녀를 춘향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참으로 도식적이다. 그래도 좋다. 그걸 잘 풀었으면 괜찮았다. 아쉽게도 영화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그렇지 못하다. <사랑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채선을, 소리스승 김세종(송새벽)은 지적한다. 여기서 영화는 진채선과 신재효의 러브라인을 영화의 겉으로 드러내려 한다. “을 등장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도리화가를 연결하려 한다. 아울러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다는 것을, 꽃이 꽃인 이유를 향기가 있음을 알리려 한다.

 

나는 지금 이 영화 <도리화가>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내가 조선시대의 전기수가 된 기분을 받게 된다. 영화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얘기를, 오히려 내가 이 글을 통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느낌이다. 마치 주해(註解)를 달아주는 느낌이다.

 

아울러 이 영화음악도 그렇다. 사극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음악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서편제>의 김수철, <휘모리>의 김영동, <서편제>의 속편 격인 <천년학>의 양방언, 이 영화에서 판소리 외적으로 각인되는 영화음악적 효과가 <도리화가>에서는 아쉽다.

 

이런 많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다음의 두 가지가 충족되었다면, 이 영화는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 <서편제>를 통해서, 판소리 서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처럼, 이 영화는 너름새에 보다 치중했었어야 했다. 너름새를 통해서 판소리 특유의 연기론을 얘기할 수 있었을 거다. 너름새에 치중했다면, 대원군-신재효장면에서 너름새- 진심인가? 연기인가? -가 더 살았을 거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제목도 도리화가(桃李花歌). 도리화가의 사설을 제대로 살려서 만들어진 노래가 남았더라면, 이 영화는 훗날이라도 보다 더 회자되었을 것을. <도리화가>가 남았듯이 말이다. (*)

 




#저자 약력
尹重剛, 1959년 인천생. 음악평론가, 연출가. 방송인. 현재 KBS클래식FM <흥겨운 한마당> 진행자. 저서로 『영화로 영화를 좇다』, 『비평에 해답이 있다』 등.
sige6163@hanmail.net
글쓴이 : 윤중강
작성일 : 201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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