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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과 상상력의 질감
통권 : 46 / 년월 : 2014년 7,8월 / 조회수 : 3030
-문학을 소재로 한 최근 영화들의 흐름

영화 <디태치먼트Detachment>(2011)는 애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소설 어셔 가의 몰락」 첫 구절과 함께 시작된다. “그해 가을 하늘을 온통 갑갑하게 메운 낮은 구름 때문에 컴컴하고 우중충하고 적막하던 어느 날, 나는 온종일 홀로 말을 달려 시골 마을 중에서도 특히 더 황량한 지역을 지나 저녁 어스름에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마침내 음침한 모습의 어셔 저택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했다.”(애드거 앨런 포, 「어셔가의 몰락」).

 

기간제 문학교사인 헨리는 소위 문제 학교에 오게 된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행복한 학교는 대략 비슷하지만 문제 학교는 갖가지의 이유로 문제적이다. 가령 어떤 학생은 충고를 하는 여교사에게 친구들을 시켜 윤간하겠노라고 위협한다. 급기야 선생님의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한다. 그래서 퇴학을 시켰더니 이번엔 마약중독자 엄마가 학교를 찾아와 선생님에게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느냐며 폭력을 휘두른다. 정작 학부모의 날에는 아무도 학교에 찾아오지 않으면서 말이다. 학부모나 학생들은 마치 분노조절 장애에 빠져 있는 듯싶다. 영화 <디태치먼트>의 한 장면이다.

 

얼핏 보면, 학교의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처럼 여겨지지만 <디태치먼트>는 우아하고 기품 있다. 이 기품은 영화 <디태치먼트>의 문학성으로 말해질 수도 있다. 문학성의 실체는 제목 “디태치먼트”와 연결된다. 초연함, 바로 영화는 이 지독한 교육 현실에 대해 언성을 높인다거나 격분하며 선동하지 않는다. 다만 이 지독한 현장을 지긋이 바라본다. 헨리 역을 맡은, 애드리언 브로디의 눈빛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무도 듣지 않는 문학 시간,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차분히 읽어 내리듯 그렇게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간혹 어떤 작품을 보고 문학적이라고 표현한다. 문학이 아닌 영화나 음악, 미술과 같은 타 장르 예술을 두고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서사적이라고 표현하거나 시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화를 두고 문학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일종의 칭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똑같이 <어셔 가의 몰락>의 첫 번째 구절을 인용한 라스폰 트리예의 작품 <님포매니악Nymphomaniac>(2013)도 그렇다.

 

영화 <님포매니악>은 색정광이라는 이름답게 숱한 화제를 뿌렸다. 영화는 모두 열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네 번째 장이 바로 섬망Delirium으로 애드거 앨런 포우의 <어셔 가의 몰락> 첫 구절과 함께 시작한다. 애드거 앨런 포우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지독한 섬망에 시달렸다고 한다. 섬망은 대개 중독의 부작용으로 알려져 있다. 알콜에 중독되었던 애드거 앨런 포우는 결국, 괴물과 곤충이 자신을 덮친다는 섬망에 빠졌다. <어셔 가의 몰락>에 등장하는 어셔 남매들처럼 말이다.

 

사실, 라프 폰 트리예 감독의 작품은 무척 시적이다. 전작인 <멜랑콜리아Melancholia>(2011)만 해도 그렇다. 그는 지구가 곧 멸망하리라는 사실을 두 개의 그림자, 세 개의 행성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19번 홀의 미장센으로 표현해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열정을 우울증자의 용기에 비유한 것도 과감하다. 이는 무척 담대한 은유를 닮아 있다. <님포매니악>의 “섬망” 장 역시 그렇다. 섬망에 시달리며 죽는 아버지는 과감하게 흑백으로 연출된다.

 

이는, 겨울엔 나무를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가라는 아버지와 딸의 대화로도 변주된다. 아버지의 대답이 더욱 그럴 듯하다. 아버지는 겨울은 나무들의 영혼이 드러나는 시절이라고 말한다. ‘님포매니악’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섹스 자체가 아닌 삶과 죽음을 보여준다. 모든 잎이 떨어진 겨울, 영혼을 간직한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잔상을 남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껏 나뭇잎을 달고 있는 여름의 나무들과 달리 겨울나무들은 작은 순 안에 존재를 웅크린 채 감춘다.  

 

이런 상징성을 대할 때, 우리는 문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동원한다. 2014년 초 주요 외국어 영화상을 휩쓴 <그레이트 뷰티The Great Beauty>(2013)라는 영화에게도 이런 수식어가 허용될 법하다. <그레이트 뷰티>는 올 해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맞는 한 스타 작가를 다루고 있다. 영화 <그레이트 뷰티>는 영상으로 써낸 프루스트Marcel Proust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워낙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자주 언급해서도 그렇지만 영화의 서사적 구성 자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서사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언어의 극한에서 찾아낸 기억의 부스러기라면 <그레이트 뷰티>는 이미지로 재현한 기억의 원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내”가 마들렌의 촉각과 미각으로부터 어떤 시간의 입구를 찾는다면, <그레이트 뷰티>는 첫사랑 “그녀”의 부재로부터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간다. 그녀, 첫 사랑의 그녀,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가는 순간 얼굴을 비끼고 뒤돌아선 그녀,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다시 한 번 뒤돌아섰던 그녀.

 

그녀의 남편은 젭을 찾아와, 알리스가 평생 사랑한 남자가 바로 “당신”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일기장에 써 있다고도 말한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젭은 당장 그 일기를 보여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황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회상할 뿐이다. 회상 속 그녀는 싱싱한 피부를 드러낸 채 바닷물 속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검은 달빛 아래 그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동자도, 그렇게 과거의 회상 속 물결과 함께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그레이트 뷰티>는 무척이나 영화 문법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도 그렇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각의 연쇄가 일단 그렇다. <그레이트 뷰티>의 서사는 줄거리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통해 이어진다. 이질적인 이미지들은 훌륭한 몽타주로 전환되어 인접 언어의 상실이 만들어낸 은유적 편집의 마술을 체험케 한다. 그건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마술이다.

 

이는 <님포매니악>이나 <디태치먼트>, <멜랑콜리아>에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어떤 예술의 극치를 문학적 감수성, 즉 깊이 있는 인문학의 시선으로 만들어낼 때 우리는 그 영화를 문학적이라고 부른다. 가장 영화다운 영화를 문학적이라고 표현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은 오히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비문학성에서 증명된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와 같은 작품이 여러 번 영화화되었지만 단 한 번도 극찬을 받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에 개봉했던 몇 편의 영화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The 100-Year-Old Man Who Climbed Out the Window and Disappeared>(2013)이나 <리스본행 야간열차Night Train to Lisbon>(2013)는 모두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두 소설은 우리가 흔히 “소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즉 기가 막힌 사연에서 출발한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노인은 1900년대 역사의 주요한 부분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코부터 시작해 스탈린, 심지어 김일성까지 직접 만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의 여정 역시 유사하다. 서지학자로 책만 들여다보며 살아가고 있는 스위스 학자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우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게 된다. 우연히 얻게 된 책 그리고 그 책을 쓴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반세기 전 포르투갈을 휩쓸었던 폭풍 같은 역사적 삶으로 초대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여정을 통해 뜨거운 간접체험을 하게 된다.

 

사실상 영화와 소설을 읽고 본다는 것은 간접 체험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부분 소설이 영화화될 때 체험의 뼈대, 즉 근간화소들을 뚜렷이 살리는 반면 그 살이라고 할 수 있을 비지정 요소들, 자유화소들은 간소하게 생략하거나 변형하기 일쑤다. 하지만 문학성이라는 것은 어쩌면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술회하는 톤과 어조에 있을지도 모른다. 100세 노인의 행적보다 그 뉘앙스가 더 흥미롭고, 그레고리우스가 들은 포르투갈의 역사보다 그가 여정에서 얻게 된 삶의 질감이 더 소중하듯이 말이다. 많은 문학 원작 영화들이 범하는 실수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문학적이라고 칭찬하는 영화들이 수많은 자유 화소의 아름다움으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과도 연관된다.



글쓴이 : 강유정
작성일 : 201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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