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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이라는 자기 파멸적인 중독
통권 : 44 / 년월 : 2014년 3,4월 / 조회수 : 2412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마틴 스콜세지 감독, 1월 9일 개봉)

대중영화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듬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아예 보듬지 않으면서 보듬는 것이다. 그것은 엔터테인먼트라는 미명 하에 대중영화가 자본에 접근하는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쉬운 방식이다. 자본과는 전혀 상관없는 낭만적이면서도 신화적인 풍경에 대한 천착은 전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치는 자본의 폭력적 위계를 감안할 때 확실히 위선적이다. 이때 대중영화의 위상은 기만적 환영술이나 마취제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판적 부정성이라는 이성의 힘에 의지해 자본의 속물성과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 경우 스크린은 자본의 위력에 동조 혹은 저항하는 인간의 비천함 내지는 성찰의 풍경, 나아가 그 둘 사이의 길항의 미장센으로 채워진다. 비판적 각성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대중영화의 사회적 위상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간혹 영화를 사회정치적 쟁점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대중영화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

말장난 같지만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이하 ‘<더 울프>’)는 매력적인 나쁜 놈에 관한 영화이다. 물론 이 말이 쉽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마틴 스콜세지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짝꿍’이 만든 다섯 번째 영화라고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매력적인 커플은 지금까지, 선악이 뒤범벅된 질척거리는 시선으로 19세기 뉴욕 뒷골목의 지옥도를 포착한 <갱스 오브 뉴욕>(2002)에서 시작해, 숱한 기행으로 얼룩진 백만장자의 결코 봉합되지 않는 야망을 싸늘하게 포착한 <애비에이터>(2003)를 지나, 밀폐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신경증적으로 포착한 <셔터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공허한 구원의 서사를 갈망하는 욕망의 파국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범하게도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벗어나 세계 경제의 중심지 월 스트리트 한복판에 나타났다.

 

큰 틀에서 <더 울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 과정과, 그렇게 축적한 돈을 역시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려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월 스트리트 신출내기로 입사한 조단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그러나 뭔가 배우려던 찰나 1987년의 ‘블랙먼데이’ 광풍에 휩쓸려 해고되고 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찾은 곳이 촌동네 비상장 증권시장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천재성을 발휘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만든 갱스터 영화 <좋은 친구들>(1990)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없다. 신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로 거듭나는 최상의 방법은 뺏는 것이라는 정도이다.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이 착실하게 모은 재산의 절반을 수수료로 등쳐먹는 것에 대한 죄의식 따위는 없다. 검정색 슈트의 ‘좋은 친구들’에게 총이 있다면 벨포트에게는 몰염치를 장전한 채 고객을 호리는 매혹적인 말솜씨가 있다. 일거에 막강한 부를 쌓은 그는 이제 신출내기가 아닌 증권사 대표로 월 스트리트에 재입성하고야 만다. 하지만 상식을 초월하는 급성장이 FBI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때부터 조던에게 하달된 지상명령은 몰염치로 쌓아올린 막강한 부를 역시나 몰염치하게 지키는 일이다. 차명계좌를 만들고 스위스 행 비행기에도 오른다. 하지만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과 동시에 점점 몰락해간다.

그런데 그렇다고 <더 울프>를 정의로웠던 신출내기 증권 전문가가 주가 부풀리기 사기꾼으로 타락하는 과정, 즉 특정 개인의 일대기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조단 벨포트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는 유념해야 할 것은 일테면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에서와 같은 사기의 정밀한 전략에 대한 묘사가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 빈자리에 제어할 수 없는 향락의 광기가 들어선다는 것이 문제다. 월 스트리트의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정교한 전략이나 작전이 아니라 당황스럽게도 마약과 매춘과 난교이다.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의 경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식을 파는 사업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광란의 파티장으로 돌변한다. 아니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 <더 울프>는 단순한 성장담 혹은 몰락기가 아니다. 서사의 리듬은 그런 식의 안정된 포물선을 그리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강약 조절을 실패한 가파른 상승곡선에 가깝다. 그것의 방점은 순수에서 비순수로의 변천사가 아니라 자본을 욕망하는 순간부터 이미 예고된 탕아의 기질이 얼마나 더 불타오를 수 있을지를 뒤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힘 자체에 찍혀 있다.

이상한 것은 그런 폭주에도 불구하고 조단 벨포트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온갖 비윤리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호탕한 기질에서 뿜어 나오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지치지 않는 생명력을 과시한다. 말하자면 그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에 가깝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외양과 목소리로 체화된 문장들 하나하나 악센트 하나하나에, 스크린 속 부하직원들뿐만 아니라 스크린 밖 관객마저 뜨겁게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교주가 이식한 환상에 포획된 교인들은 곧장 전화기를 들어 그들의 고객들에게 교주와 똑같은 방식으로 주식이라는 환상을 매혹적으로 선교한다. 감당할 수 없는 돈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이제야 밝히지만 <더 울프>는 그 시작점에서 난감한 주문 하나를 발설한다. 이 펜을 지금 당장 나한테 팔아봐! 이때 수요와 공급은 물구나무를 선다. 수요 없는 공급에 대한 요구는 둘 사이의 시간성을 무시한다. ‘지금 당장’이란 펜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 가짜 필요성을 만들어 주입해 ‘지금 당장’ 펜을 사게 만들라는 요구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수요나 공급이 아닌 현실 너머의 환상이다. 물론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통 사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중영화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보듬는 또 하나의 방식을 목격한다. 자본과 상관없는 낭만에 천착하는 것도 아닌, 자본의 부조리를 이성의 비판적 힘으로 논파하는 것도 아닌, 자본주의 시스템 이면에 작동하는 환상과 욕망과 감각성에 주목하는 것. 어쩌면 조단 벨포트는 자본주의라는 환상을 떠받치고 있는 욕망의 끝없는 연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마틴 스콜세지는 앞뒤가 정교하게 맞물리는 내러티브 구축보다는 파편적인 사연과 이미지를 유려하게 뒤섞어 하나의 영화적 자화상을 구축하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감독으로 유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더 울프>는 고전 내러티브에 익숙한 입장에서는 다소 두서없게 다가갈지도 모른다. 금융자본, 매력적인 나쁜 놈,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 시시때때로 끼어드는 마약과 매춘의 광란의 파티는, 블랙 코미디라는 틀 안에서 정해진 규칙 없이 오로지 상승곡선만을 그리며 마구 뒤섞일 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산만한 진흙탕이 기묘하게도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바로 중독이다.

<더 울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는 역설적이게도 개성적인 캐릭터와 함께 숨 가쁘게 내달리기만 하던 영화가 갑자기 길게 늘어지는 대목이다. 온갖 명품으로 치장된 재기발랄한 언변의 금융재벌이 그 대목에서만큼은 말 그대로 기어 다닌다. 약에 취해 완전히 꼬여버린 혀를 더듬거리며 자신의 화려한 저택을 마치 벌레처럼 굴러다닌다. 끝 모를 탐욕이 극단의 상승곡선을 그릴 때,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FBI의 칼날이 목을 점점 더 조여 올 때, 웬만한 마약에는 내성이 생겨버린 몸뚱어리에 이제껏 맛보지 못한 최강의 약물을 집어삼킨 바로 그 욕망의 화신은,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온몸을 비틀거리며 벌레처럼 기어 다녀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카메라의 피사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수준의 조롱이다.

하지만 이것의 의미를 단순히 캐릭터의 몰락을 알리는 상징적 신호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펜을 지금 당장 나에게 팔아봐!”라는 요구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환상을 전도해 존재하지 않는 수요를 창출한 후 수수료만 먹고 튀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는 자본주의라는 부흥회에 초대받는 순간부터, 그러니까 부푼 꿈을 안고 월 스트리트를 동경하던 순간부터 그것은 예견된 파국이었다. <더 울프>는 욕망의 폭주가 어떻게 시작됐고 왜 멈출 수밖에 없는가를 묻는 영화가 아니다. 언젠가는 꺾이고 말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질주를 끝끝내 멈출 수 없는 자기 파멸적인 중독에 관한 영화이다. 환상의 고리로 결탁된 중독, 그러니까 마약과 섹스와 자본은 셋이 아닌 하나이다.

마약에 취해 난교에 빠진 자기 파괴적 질주의 감각이 다소 거북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 살색으로 치장된 과시적 미장센과 그 속에 전시되는 동물적 신음의 거친 향연은 확실히 부담스럽다. 그런데 어쩌면 <더 울프>가 노렸던 것이 바로 그런 식의 거북함인지도 모른다. 물론 대중영화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듬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그런 식의 차별적 접근이 최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은 질문한다. 1929년의 경제대공황, 1989년의 ‘블랙먼데이’, 그리고 가장 최근의 2008년 금융위기, 바로 그 반복되는 자본의 위기를 관통하는 사이 당신들이 배운 것은 무엇인가? 마약과 난교에는 거부감을 느끼면서 오히려 당신의 일상을 보다 강력하게 지배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그 욕망의 화차(火車)에는 어떻게 그리 둔감할 수 있는가?

 

이미지 제공_<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공식 홈페이지




#저자 약력
朴佑城 1977년 경남 진주 생. 영화전문주간지 무비위크 스태프평론가. 상명대 강사. ‘2008 영화진흥위원회 우수논문 공모사업’ 우수논문상 수상,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bagusus@hanmail.net
글쓴이 : 박우성
작성일 : 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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