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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격의 거인>이 질문하는 것은 무엇인가?
통권 : 41 / 년월 : 2013년 9,10월 / 조회수 : 3614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이사야마 하지메諫山創, いさやまはじめ 원작의 만화 <진격의 거인進?の巨人>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서사에 속한다. 정체 모를 식인 거인의 등장으로 이미 세계의 대부분은 사라졌고, 마지막 남은 인류는 거대한 벽을 쌓고 그 안에 ‘갇혀’ 생활하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 거대한 벽을 무너뜨리며 다시 거인이 ‘진격’을 시작함에 따라 벽 속에서의 평화는 깨진다. 거인의 공격은 ‘세계의 끝’을 의미하고, 그 속에서 인류는 절멸이냐 생존이냐의 기로에 선다. 이러한 서사는 현재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여러 위협들(기후변동, 자원부족, 원자력재난 등)과 맞닿아 있다. 무엇보다 <진격의 거인>은 단순히 거인과 인간의 싸움이라는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거인의 공포 앞에서 인류가 보이는 다양한 반응들을 담아내는 섬세함을 갖고 있다. 종교, 계급, 권력, 지역차별 등이 등장하고, 그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의 거인’처럼 사회 자체를 위협에 빠뜨리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수준 높은 재난서사는 사실 재난 자체가 아니라 재난 앞뒤에서 인간이 보이는 모습들에 관심을 갖고, 이를 사회학적·인류학적으로 탐구하는데, <진격의 거인> 역시 그렇다.?

거인 : 텅 빈 기표와 열린 해석 
이 만화 텍스트에서 중심이 되는 캐릭터인 ‘거인’은 다양한 해석이 열려 있다. 이는 최근 다시 유행하고 있는 ‘좀비’ 서사와도 유사하다. 가령 자연재해로 인한 종말서사와는 달리 ‘좀비’나 ‘거인’ 등의 상징은 개인마다 사회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좌파는 좌파대로 우파는 우파대로, 또 일본과 한국이 서로 상징을 보는 시각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진격의 거인>을 분석하는 글들마다 ‘거인’을 다양하게 표상함으로써 독자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에렌이 나중에 거인으로 변하는 힘을 가진다는 점은 거인(악, 폭력)과 싸우는 이가 다시 거인의 자리에 서게 되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 만화는 ‘거인’이라는 기표를 사실상 텅 빈 것으로 설정함으로써(‘거인’이 비밀에 쌓인 존재라는 점을 기억하라) 오히려 다양한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거인은 텅 빈 기표이므로 ‘무엇이나’ 될 수 있다. 노동자에게는 자본주의 사회일 수도 있고, 자본가에게는 ‘강성노조’일 수도 있으며, 학생에게는 입시일 수도, 여자에게는 성적인 폭력일 수도, 냉전주의자에게는 빨갱이일 수도(실제로 50미터의 성벽을 무너뜨린 거인은 ‘빨갛’다) 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언제나 정답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그것은 그렇게 텅 빈 기표로 남아 있을 때 힘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거인’이 ‘타자’other라는 것이다.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것도, 또 인류가 단합하여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도 거인, 즉 타자의 존재 때문이다. 인간은 반드시 타자를 통해서만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철학적 성찰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만화 속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인류는 거인을 절멸시킬 때 행복이 올 것처럼 믿지만, 오히려 거인/타자가 사라지는 순간 인간은 다시 새로운 거인/타자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울 대상이 생기고, 그것이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 에렌이 인간과 거인의 자리를 순환한다는 설정은 매력적이다. 평범한 인간이 사실은 신의 능력을 가진다는 서사적 요소는 멀리는 그리스신화의 영웅들과 <성경>의 예수에서부터 가깝게는 <헐크>와 <수퍼맨>을 비롯한 수퍼히어로 서사로까지 변형되며 이어져왔다. 이러한 <진격의 거인>의 설정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거리가 사실은 멀지 않음을, 즉 주체가 자신을 타자와 구분 짓지만 사실 자신도 언제나 다른 주체에게는 타자일 수 있다는 어떤 진리를 말해준다. 주인공 에렌을 통해 인간과 거인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이 만화는 독자에게 철학적인 질문을 제대로 던지는 것이다. ?

진격: 의지로 뭉친 진보주의적 세계관 
<진격의 거인>에 담긴 어떤 ‘세계관’ 역시 흥미롭다. 조사병단에 속해 있는 주요 인물들은 각자 반복적으로 ‘세계는 원래 잔혹하다’, ‘세계는 강자가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지옥이다’라는 세계관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쇼펜하우어적인 비관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실은 니체적 ‘의지’다. 니체 역시 세계의 비참함에 관한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이 세계를 의지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로 ‘세계는 잔혹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죽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 싸워야만 이길 수도 있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한다. 거인에 비해 모든 것이 초라하지만 이들은 ‘의지’ 하나로 거인을 이길 수 있다는, 즉 거인 위에 선 더 큰 거인이 될 수 있다는 ‘의지를 통한 자기극복’을 역설한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초인Ubermensch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너는 너를 극복해서 ‘새로운 너’가 될 수 있다는 니체적인 세계관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거인보다 약하지만 거인이 될 수 있는 존재고, 거인은 인간보다 강하지만 의지가 없기에 절대 거인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거인보다 본질적으로 더 큰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 에렌을 비롯한 병사들이 대개의 다른 소시민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도 이들에게는 그러한 자기극복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격의 거인>은 ‘좀비’ 서사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좀비 서사에서 인간은 아무리 좀비를 죽여도 거기서 어떤 극복이나 희망의 계기를 찾지 못한다. 좀비는 ‘생살’에 대한 욕망 밖에 없는 반-주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없앤다고 해서 나 자신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좀비를 모조리 죽여도 우리는 과거 나의 이웃이었던 사람들을 죽인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좀비 서사는 이러한 극복의 서사, 달리 말하면 진보의 서사를 부정하는, 진정한 ‘절멸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진격의 거인>에는 인간 문명이 인류를 막는 거인을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보주의적 기운이 넘친다. 벽 안에서 평화롭게 살면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광신자이자 겁쟁이로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반면, 좀비 서사는 ‘어떻게 하면 좀비를 막을 벽을 세우고, 그 안에 머무를 수 있을까’ 하는 게 최종목표가 된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 에렌이 거인으로 변하는 설정이 있고, 그것이 ‘진보주의의 어두운 그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격의 거인>은 본질적으로 ‘진보주의’의 서사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 중에 이렇게 강력한 진보주의적 분위기를 담고 있는 작품은 드물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환경과 에너지 등에 닥친 위기가 현실의 기반을 급격히 파괴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부정성보다는 ‘희망’과 ‘꿈’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진격의 거인>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아마도 이런 진보주의적 요소가 아닐까 싶다(역으로 완벽한 부정성의 표상인 ‘좀비’ 서사가 한국에서 유독 인기 없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

인류: 영원한 위기로서의 삶 
<진격의 거인>은 만화 특유의 혼종성을 보여준다. 가령, 의복은 중세적이고, 건축물은 근대적이며, 헤어스타일이나 기술은 현대적이다. 인물들의 다양한 이름이 말해주듯, 이러한 혼종성은 다양한 민족이 섞여 하나의 폐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시대적 배경과도 연관되어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종’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의아하다). 이 폐쇄 공동체의 이름이자 만화 속에서 ‘거인’과 더불어 가장 자주 호명되는 이름이 바로 ‘인류’다. 성벽 너머에 어딘가에 있을 바다를 꿈꾸는 ‘인류’는 ‘진격’해 들어오는 ‘거인’이라는 절대적 타자 앞에서 필사의 투쟁을 벌인다. 다시 말해, 인류는 거인을 물리치면서 한 발 한 발 성벽 바깥으로 ‘진격’하려 한다. 이 투쟁 속에서 인류와 거인, 주체와 타자, 우리와 그들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장 밀접하게 붙어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만화 바깥, 현실 속의 모습이다. 재난과 위기, 파국의 가능성 앞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 인류는 세계를 이렇게 만든 ‘거인’들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중이다. 인류의 예상과는 달리, 이 ‘거인’의 정체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으며, ‘거인’을 무너뜨릴 방법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또, ‘거인’이 없어진다고 해서 인류가 과연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역시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거인’은 어쩌면 인류를 영원히 괴롭히면서도 영원히 정체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을 비밀스런 위기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인류는 이 보이지 않는 실체, 이 텅 빈 기표의 공포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졌으며, 각자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짐짓 허황되어 보이는 만화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진격의 거인>이라는 텍스트가 던지는 질문들은 묵직하기만 하다.




#저자 약력
文炯竣
1975년 광주 생. 문화평론가.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저서로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파국의 지형학』, 『영어를 잘하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역서로 『권력을 이긴 사람들』, 『루이비통이 된 푸코?』(공역)가 있다.
caujun@naver.com
글쓴이 : 문강형준
작성일 : 201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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