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18년 전, 영화는 유레일의 선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로는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갈라지고 합쳐지며 기차는 어딘가를 향해 그 위를 달려간다. 그 기차에 탄 사람들은 각자 목적지가 있을 것이고, 기차에 타게 된 사연이 있을 것이며, 혹시 누군가는 그 기차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르본 학생 셀린^{줄리 델피}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개강에 맞춰 파리로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독일인 부부가 심하게 다투기 시작하고, 참다못한 셀린은 다른 자리로 옮겨 간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미국인 청년 제시^{에단 호크}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 대화를 이어나간다. 어린 시절의 꿈과 미래,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고, 어느 새 제시가 내려야 할 비엔나 역에 도착한다. 잘 가라는 가벼운 인사로 헤어지려는 순간 제시가 “같이 내리지 않을래? 너와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같은 마음이었던 셀린은 제시를 따라 내리게 되고, 제시가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다음날 아침까지 둘은 평생 잊지 못할 ‘비엔나에서의 낭만적인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마침내 다가온 이별의 순간, 두 사람은 6개월 후 같은 시간에 비엔나 역 플랫폼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Au revoir!”와 “Later!”를 주고받으며 헤어진다.

 그들은 과연 6개월 뒤에 재회했을까? 이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제시와 셀린의 아름다운 만남과 아쉬운 이별은 이런 궁금증을 끊임없이 자아냈고 ‘Before 시리즈’가 탄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에 이은 <비포 미드나잇>(2013)이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 <비포 선라이즈> 이후 18년 만의 일이다. 1995년 당시 영화를 보고 나서 유럽여행을 계획했던 젊은이들은 이제 40대가 되었다. 우리가 늙는 동안 제시와 셀린은 어떻게 되었을까?

* Ⅱ.

 18년 동안 우리가 나이 먹었듯 그들도 늙었다. 풋풋했던 제시와 셀린은 어느 새 삶의 무게와 함께 주름과 군살이 늘어난 중년이 되었고, 두 딸과 아들의 부모가 되어 자신들의 낭만보다 자식들을 먼저 책임져야 하는 생활인이 되었다. <비포 선라이즈>의 스쳐가는 낭만을 떠올린다면 ‘아름다운 과거는 그것대로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생기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차피 <비포 선셋>이 나온 이상 <비포 미드나잇>으로의 귀결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세월처럼, 나이 먹고 싶지 않아도 계속 늙어가는 우리네 인생처럼 말이다.
<비포 미드나잇>은 제시가 아들 헨리를 혼자 비행기에 태워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시가 아쉽게 아들을 떠나보내고 공항 건물에서 나오자 셀린이 기다리고 있다. 이로써 9년 전(<비포 선셋>) 셀린의 집에서 차를 마시며 비행기를 놓칠 것 같이 늦장을 부리던 제시는 예정된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는 게 밝혀진다. 이후 제시는 프랑스에서 셀린과 함께 살며 소설을 썼다. 환경운동가였던 셀린은 사회활동을 계속하며 쌍둥이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리스 서쪽 지중해와 마주하고 있는 카르다밀리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다. 제시가 ‘작가의 집’에 초청을 받아 셀린과 쌍둥이 딸까지 함께 여름휴가를 그리스로 오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제시의 전처와 살고 있는 헨리도 함께 휴가를 보냈고, 바로 오늘은 헨리를 먼저 떠나보낸 날이다.

* Ⅲ.

 헨리를 보낸 날 밤, 그리스 작가 부부가 제시와 셀린에게 호텔 숙박권을 선물한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떼어놓고 둘만의 하룻밤을 보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은록색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 지중해의 석양이 비껴드는 한적한 오솔길을 둘만의 대화로 채우며 걸어간다. 그리고 호텔에서 과일과 와인, 바다 바람 소리 속에 오붓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헨리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셀린이 아들과의 이별에 힘들어 하던 제시에게 헨리의 전화를 바꿔주지 않은 것, 제시가 셀린에게 미국에 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비포 선라이즈>나 <비포 선셋>에서 몇 시간 후면 헤어질 것이기 때문에 관대할 수 있었던 사소한 문제들이 이제는 계속 살 것이기 때문에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국제결혼의 어려움, 남녀의 입장 차이와 그것에 따른 불만이 표출된다. 제시와 셀린의 대화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실감이 나서 중년 부부들의 공감을 살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청순하고 낭만적이던 제시와 셀린도 같이 살아보니 어쩔 수 없구나!’라는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헐뜯고 할퀴던 다툼 끝에 급기야 셀린이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호텔방을 뛰쳐나간다. 낭만과 현실은 이다지도 다른 것인가? <비포 선라이즈>에서 말다툼하는 독일인 부부를 보며 셀린이 말했었다. 나이 들수록 여자는 저음을 못 듣고, 남자는 고음을 못 듣기 때문에, 커플은 늙어갈수록 상대방의 말을 듣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그러자 제시가 대답했다. 그것은 서로를 죽이지 말고 함께 늙어가라는 자연의 처사라고. 젊은이들도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할 수 있는, 만고의 진리인 것처럼 소문이 나있는, ‘일정한 유효기간이 지나면 부부는 계속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인가?

* Ⅳ.

 방을 나온 셀린은 카페에 홀로 앉아 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첫눈에 매혹된 것처럼 말을 건다. 제시다. 셀린은 모른 체하다가 농담할 기분 아니라며 외면한다. 그러자 제시는 40년 후 셀린이 보낸 편지를 가지고 왔다며 자신이 미래에서 온 메신저라고 말한다. 셀린을 화자로 하는 편지의 내용은 평생 가장 아름다운 밤은 마흔 두 살 때 펠로폰네소스에서 보낸 하룻밤이었다는 것이다. 제시의 낭만적인 재치로 부부의 위기 국면은 다시 극복되고 두 사람 평생의 가장 아름다운 밤이 예고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틈입하는 낭만의 효용! <비포 선라이즈>에서 같이 내리자는 제시의 말에 셀린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제시는 10~20년 후를 이야기한다. 셀린의 결혼생활이 옛날만큼 재미가 없어졌을 때, 그래서 남편을 탓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선택하지 않은 남자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을 때, 옛날에 놓친 게 없어야 다시 현재의 삶에 감사하며 남편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시와 셀린의 현재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셀린은 다른 남자가 아닌 제시와 살고 있다. 제시와 헤어져 사는 9년 동안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셀린은 제시를 그리워했고, 파리에서 재회했을 때 제시가 연분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제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 헨리에 대한 의무감으로 형식적인 결혼생활을 하던 제시는 셀린과 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프랑스에 눌러앉았다. 그리고 9년 동안 함께 살아온 것이다. 그리워하고 감정을 검증할 수 있는 9년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에는 놓친 게 없다. 놓치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은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제 한편의 인상주의 그림과 같았던 젊은 날의 로망은 인생이라는 실제적인 길 위에서 효용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들은 낭만적인 순간이 있었기에 변화하는 현실을 견딜 수 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낭만적인 순간을 만들어줄 수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남은 삶을 여전히 꿈꿀 수 있다. 그러한 깨달음은 20대에는 알 수 없었던, 삶의 경험이 준 선물인 셈이다. 그래서 <비포 선라이즈>에서 보여준 청춘의 순간을 그대로 두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서두의 말은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가 있어서 <비포 미드나잇>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비포 미드나잇>이 있어서 <비포 선라이즈>가 더 의미 있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낭만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보다 생활 속의 낭만을 발견하는 것이 적어도 우리네 삶에는 더 도움이 되니까.